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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최장의 추석 연휴를 맞아

by 지뉴

드디어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어요. 브런치 글벗님들은 지금 다들 뭘 하고 계시려나요? 저는 아이들 점심을 챙겨주고 장을 본 뒤, 잠시 집 근처 카페에 나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아직 여름의 기운이 머물고 있는 건지, 조금 움직였다고 등에서 땀이 송골송골 올라오네요.


이번 추석은 제가 기억하는 한 생에서 맞은 가장 긴 연휴에 둘러싸여 있네요. 적게는 7일에서 (대다수의 학교들에서) 많게는 10일간 이어지는 연휴가 얼마나 귀한 시간이 되어줄까요. (행운인지 어쩐지, 몇 해전부터 저는 명절 제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어요. ㅎ) 어제 오후 이후부터 많은 이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물론 대가족의 제사상을 책임지고 있을 이들은 다가오는 추석이 부담되는 날이기도 하고, 추석 연휴가 끝날 무렵에는 여느 해처럼 또다시 명절에 발생한 가족 간의 갈등 관계나 성평등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요.


이번 연휴를 제일 처음으로 인식한 건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해의 '빨간 날'을 체크하던 제 손이, 얼핏 들었던, 최장의 연휴에 관한 기사를 떠올리며 달력을 넘기고 넘겨 2025년에까지 이르렀고, 장장 열흘에 가까운 연휴가, 비록 십 년 후 이긴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5년에 바라보는 2025년은 마치 구십 년대에 미드 'X-파일'을 보며 생각하던 세기말, 20세기말에 상상하던 '2020우주의 원더키디’와 흡사한 느낌으로 다가왔는데, 막상 그 세월을 거쳐와 보니 세상에 별 다를 건 없다 싶네요. 나날이 끝을 모르는 듯 팍삭 익어가고 있는 제 몸뚱이가 가장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만.


문득 이십 대의 제가 지금의 저를 만나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집니다. 너 왜 이렇게 됐어?라고 하려나요. ㅎㅎ 그때는 사람이 중년에 이르면 재미도 뭣도 없이 그저 자식 보면 근근이 살아가는 줄로만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막상 닥쳐보니 그건 또 그렇지 않고, 마음만은 방부제를 가득 머금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 중년도 제법 재미나게 살아갈 만한 세상이다 싶어요. 이십 대에 무덤덤하게 봤던 책이나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배로 더 재미있으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같은 풍경을 봐도 진일보한 예민함과 세심함으로 더 깊이 그리고 진득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고요.


'빨간 날'을 언급하자니 생전의 아빠와 신경전을 벌였던 어떤 날의 기억이 소환됩니다. 중년에 자영업을 시작한 아빠는 쉬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장님이었고, 업무 시간이나 기타 스케줄 모두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조정할 수 있는 위치였어요. 하지만 저는 조직에 속한 직장인이었고, 달력의 빨간색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빛으로 추앙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날도 달력을 보며 빨간 날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해에도 휴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자연스럽게 그 사실에 대한 기쁨을 표했더랬죠. 그런데 그런 저를 아빠가 너무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거예요.


"너는 노는 날을 뭐 그리 좋아하냐?! 쯧쯧~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빨간 날이야말로 직장인들 좋으라고 있는 날일 텐데, 빨간 날이 빨개서 좋다고 하는데, 제가 무얼 했다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니, 저는 너무나 억울했더랬죠. 직장에 가면 주변 동료들 다 저와 같은 마음이었고, 쉬는 날을 챙기고 기다리는 건 직장인의 권리인 것을.. 아빠는 매일 아침 코뚜레에 꿰어 질질 끌려가다시피 직장으로 향하는 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빠도 젊은 시절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았어요. 사람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곳에 대한 적응력이 정말 좋다는 걸 그 순간 새삼 느꼈더랬죠. 그때는 억울한 맘이 한이 되고, 사리가 될 지경이었건만, 지금은 세상 억울했던 그 상황이 두 번 다시는 함께 곱씹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버렸네요.




연휴가 되어도 맘 편히 '휴'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몇 해 전까지 저도 그랬었고요. 제사상을 물리고 층층이 쌓여있는 설거지감 미션을 다 수행하고 나서도, 이제 무슨 일을 더 해야 하나, 눈치를 살피며 늘 좌불안석이었어요. 진정한 연휴를 앞두고, 카페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이리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명절 제사상에서 저를 기꺼이 해방시켜 준 조상의 덕이겠지요. 비록 명절 연휴 뒤 곧바로 이어지는, 지옥 같은 일정의 중간고사를 앞둔 딸아이 때문에 어디 제대로 바람 쐬러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이 좋은 가을날에 더 이상 큰일 마려운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조상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브런치 글벗님과 독자분들 모두 즐겁고 편안한, 최장의 추석 연휴를 보내시길 바라요. 이 정도로 긴 연휴는, 금성과 목성이 일직선에 가까워지는 시기처럼 한참을 기다려야 또 돌아오는 것이겠죠. 그때가 오면 아마도, 카페에 앉아 여러분께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활동 중독'에 걸려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번 연휴만큼은 제사상을 물리고 난 뒤, 단 하루라도 '무위의 삶'을 즐겨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 보려고요. 그마저도 애써서 수행해 내야 하는 미션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요. ㅎㅎ 모두들 해피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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