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2학년에 올라가니 다정한 선생님은 아이들이 풍금을 만질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냥 건반을 두드리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작고 어린 발로 힘껏 페달을 구르면 부웅~ 무언가 터지며 나는 소리와 함께 벙어리 같던 건반들이 소리를 냈다.
3학년에 올라가니 새로 만난 재주 좋은 선생님은 우리 반 전체를 합주반으로 만드셨다. 나는 아무 악기도 다룰 줄 몰랐던 데다 여학생 중에 키가 제일 컸는데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작은북을 맡기셨다. 나는 큰북을 치는 까불이 남자애와 교실 가운데줄 제일 뒤에 나란히 앉아 일 년을 보냈다. 트라이앵글이나 짝짝이를 치는 아이들보다는 분명 멋진 악기이기는 했지만 나는 합주 연습 내내 오른쪽에 무리 지어 앉아 아코디언을 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 애들은 악보를 보며 건반을 누를 줄 아는, 그러니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었다.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진 나는 급기야 음악시간에 펼쳐놓고 피아노 연습을 했던 종이 건반을 집에서 펼치고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그것이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는 시위로 느끼셨던지 많이 조르지도 않았는데 싸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아 오셨다
큰 고개 너머 사는 J라는 교회 친구의 큰언니(그 집은 네 자매 중 J가 막내였다)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교회 반주를 할 정도로 피아노를 잘 치는 언니였다. 엄마는 그 집 권사님께 나를 부탁하셨고 큰 언니가 우리의 청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연습도 그 집에 가서 하는 좋은 조건이었다.
피아노를 일주일에 몇 번이나 치러 갔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레슨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 고개 넘어가는 버스 왕복 차비로 30원을 쥐어주셨고 나는 돌아오는 버스비를 지불할 때까지 내내 동전을 잃어버릴까 봐 신경을 무척 썼던 것이 기억난다. 돈을 잃어버리면 영영 집에 못 돌아올 것처럼..
친구 J네 집은 2층 양옥집, 당시로는 드라마에 나옴직한 좋은 집이었다. 그 집 언니들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받으며 바이엘을 치던 몇몇 날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단조로 된 악보를 처음 치던 날은 어쩌면 내가 음악의 감성을 처음 깨달은 날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매우 단조롭고 간단한 바이엘 상권의 한 페이지였을 그 장을 치면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음들이 얼마나 슬프던지 나는 그 구슬픔에 완전히 사로잡혀 혼자 한껏 감정에 도취되어 (나로서는) 연주를 했다. 그날 이후 피아노는 그냥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구조를 가진 거대한 물체가 아니라 내 조그만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요술상자였다
고개를 오르내리며 그렇게 피아노 배우던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큰언니가 고3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동네 피아노 개인 교습소를 보내주셨지만 그즈음 나에게 피아노는 슬프게도 학교 외 또 다른 숙제가 되어버렸다. 피아노 선생님이 너무 엄했던 것도 이유였지만 4학년이 된 나는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을 뒤로하고 피아노 레슨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무서운 선생님이 기다리는 그분의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에는 사루비아가 잔뜩 피어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몇 개 따서 빨아먹었을 텐데 나는 거의 매번 뛰어서 그 골목을 지나쳤다.
5학년이 되자 아빠가 중고 피아노를 사주셨다. 실력이 꽤 는 딸의 피아노 연주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그런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아빠는 빨간색 가죽 커버로 쌓인 세계 명곡집을 사 오셨다. 그 안에 있는 곡들 중 내가 칠 수 있는 곡은 거의 없었지만 보기만 해도 현란하고 멋진 악보들이었다. 어느 주말 아빠는 나와 동생들의 요청으로 명곡집 악보 상단에 영어로 쓰여있는 작곡가들의 이름을 손으로 짚으며 하나하나 불러주셨다. 차이코프스키, 모차르트, 핸델... 한 장 한 장 넘기며 난해한 외국 작곡가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아빠는 기분이 뿌듯하셨을까? 문간방 시절 어려운 결심을 하고 피아노를 가르친 딸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이제는 안방(피아노를 넣을 만한 방은 안방뿐이었다)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대견하고 기분 좋으셨으리라
피아노 레슨은 6학년 때 어영부영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 그만두었지만 그 후 나는 교회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전공도 하지 않은 중학생에게 맡겨진 것이 여전도회 성가대 반주였다는 것이다. 음악 지식이 대부분 전무한 교회 여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찬양은 나 정도의 실력으로도 소화가 가능했기에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나는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주-같은 소절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했으며 내내 얼굴을 부루퉁해 있었다. 그 시간은 정말 재미없을뿐더러 결국 피아노를 싫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추석 추도예배 찬송 반주를 한번 해보라 하시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피아노 얘기를 하셨다. 입주과외를 하며 어렵게 대학 다니던 대학생 시절, 앞 집에서 종종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었다고. 나중에 결혼하면 나의 집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일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해서 좋으셨다고, 예배 시간 반주하는 나의 모습이 매일매일 자랑스러우셨다고
돌이켜보면 즐겁게 피아노 배우던 시간은 그저 1-2년 남짓, 이후 한참사춘기던 소녀는 피아노가 그저 지겹다며 지겹다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아빠에게는 그것이 힘겨운 대학시절 소망의 성취였고 행복이셨다
아직도 소중히 간직(만)하고 있는 빨간 커버의 세계명곡집에는 젊은 시절 우리 아빠의 기쁨과 기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