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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속의 지니 May 18. 2024

데미안

(사람)

k는 나에게 다가와서 내가 나온 중학교 이름을 말했다

'응 맞아, 거기 졸업했어'

'나도 거기 졸업했어, 널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수줍게 얘기했지만 나는 이 자그마한 아이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같은 중학교 졸업생일 뿐만 아니라 통학버스도 같은 노선을 타고 다녔고 무엇보다 교복이 없어져 더 어수선하고 천차만별이 되어 버린 고등학교 첫 학기라 선뜻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k중학교 때  규율반이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 조회시간 구령대 위로 끌려 올라가 (이상한 종교를 가졌다고 소문난) 남자 선생님에게 마이크 꼭지로 머리를 맞던 기억이 스쳤다.

k의 기억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등교시간 머리 길이가 길어(당시는 귀밑 3cm 이하가 기준이었다) 걸린 내가 '운동장에서 휴지 10개 줍기' 벌이 떨어지자 마침 근처에 있던 껌종이를 주워 10개로 찢어 근처에 서있던 규율반 학생에게 내고 교실로 가버리더란다. 범생이 k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들에게 교무실에서 얼마나 차별적 선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교무실로 불려 갈 경우 어떤 대응이 상황을 쉽게 종료하는지 요령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학교 규율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그렇다고 무례하고 상식 없는 학생은 아니었다)

하여튼 k는 그 당시 내 모습을 보며 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고 말했다.

좀 더 사이가 깊어진 건 둘 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였다.


우리는 지겹도록 데미안을 해부하며 등하교 시간을 보냈다. 데미안을 시작으로 우리는 공통된 관심사가 예상외로 많다는 걸 발견했다. 사이먼&가펑클의 그 유명한 히트송을 제쳐두고 Island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곡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영화 에덴의 동쪽 대본집을 구해 함께 읽기도 했다

k와는 학년이 바뀌어 다른 반으로 배정받고, 내가 요란하고 시끄러운 친구들을 잔뜩 사귀면서 조금씩 멀어졌고, 이후 나는 재수를, k는 대학을 들어가면서 더 멀어져 버렸다. 그래도 우리 둘 사이에는 언제나 애틋함이 존재했는데 k가 운동권에 투신하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공무원이 되어 버리면서 우리는 진짜 멀어져 버렸다.

k의 삶이 그 후로도 내내 힘겨웠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결국 k가 먼 지방으로 이사 가면서 소식이 끊겨버렸다

오래도록 만나지도 소식 하나 듣지 못하지만, k는 내 십 대 최고의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며 내 생애 최초이자 최대의 감성시대를 함께한 잊지 못할 친구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 변함없이 꽂혀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나에게 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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