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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진 Feb 18. 2023

방향

 



 엄복동의 나라에서 자전거를 선물 받았습니다. 사실은 부모님께 졸라서 뜯어냈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누가 쓰던 중고 상품이었지만 만족했습니다. 아직은 튼튼해서 쓸만했고, 핸들에 귀여운 종도 달려있습니다. 이것의 용도는 앞으로 수월하게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저의 두 다리로 걷는 것보다 이동차로 구르듯이 전진하면 더 편할 것입니다. 부모님도 이게 있으면 더 빨리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근데 앞이 어디냐고요? 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달리는 길이 인생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앞이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 어딘지 모르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잖아요. 이제 이것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겠죠. 이것만 타면 제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거죠. 저는 기대를 품고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쉽게 페달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막상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는 겁니다. 막막합니다. 녹록지 않습니다.


거대한 성벽이 제 앞을 막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언제 걷힐지 모르는 안개 때문에 막연히 손을 휘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는 사막에 서있는 것입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 똑같은 모래 언덕, 똑같이 검은 바다뿐입니다.


그래도 방향 정도는 정해두고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하필 지금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이렇게나 사람을 잠잠하게 만듭니다. 장애물도 가고자 마음먹고 걸었을 때라야 넘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모래 바닥에 앉았습니다. 한참을 멍하게 있는데 제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습니다. 운전자는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쓴 사내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해?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도 이내 제게서 관심을 거두고 자신의 이동차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하, 이 고철 덩어리.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간지 나는 스포츠카였어. 아버지가 쓰던 이딴 촌스러운 오토바이가 아니라고.


제 눈은 주차된 오토바이를 향했습니다. 클래식한 느낌의 연식 있는 오토바이였습니다. 고철 덩어리라는 말과 달리, 작동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습니다. 조금 부러워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받은 자전거는 수륙양용이었던가요. 사막의 모래 길은 갈 수 있는 이동차이던가요. 태평양이라도 건널 수 있는 이동차이던가요. 방향을 잡아줄 내비게이션은 있던가요.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쪽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그가 구둣발로 오토바이 바퀴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대체 무엇에 화가 난 걸까요. 당신은 이미 저보다 좋은 탈것을 가지고 있는 걸요. 조막만 한 열쇠를 꽂기만 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소유했는걸요. 이런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는 어딘가로 떠나버렸습니다. 오토바이 바퀴가 회전하면서 제 쪽으로 모래가 튀었습니다.


옷깃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는데 제 앞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세에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큼지막한 바퀴가 모랫길을 시원하게 가로질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것이 분명 새 상품입니다. 딱 보아도 비싸 보이는 이동차입니다. 금방 지나가버려서 잘 보지 못했지만 운전자는 제 또래 같아 보였는데. 아니, 또래가 맞을 거예요. 운전 솜씨가 형편없었으니까요. 틀림없이 부모님이 사주신 이동차겠죠.


쯧, 부모를 잘 만난 주제에 으스대기는.


제 자전거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나사 부분에 녹이 슬고,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졌습니다. 멀쩡한 줄 알았는데 흠집이 많았습니다. 허름한 게 볼품없어 보였습니다. 별안간 저는 화가 나서 자전거를 발로 찼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이동차였어. 이딴 중고 자전거. 구를 수 있으면 뭐 해?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자전거는 사막에서 쓸 수도 없잖아? 다 무용지물이야. 다 쓰레기야.


씩씩거리며 애꿎은 바닥에 대고 분풀이를 했습니다. 모래 먼지가 어지럽게 일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저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웬 사람 목소리였습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이인지, 노인인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끝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누군가’라고 칭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지나치려 했습니다. 저는 상대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누군가는 이동차 하나 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넓고, 위험한 사막 지대를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그냥 걷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만하다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엘도라도가 어디 있는지 알기라도 한 건가요. 이런 황막한 곳에서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문득 궁금해져서 누군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왜 그렇게 신이 난 거예요?


상대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제야 누군가는 저를 발견하고 이쪽을 돌아봤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걷다 보니 그냥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어. 방금 전까지는 울고 있었는데. 하하.

그럼 어디에 가는 중이었죠? 목적지가 어디예요. 어딜 향하는 거예요.

그런 건 몰라. 걷는데 꼭 목적지가 있어야 하니? 그냥 산책하는 거야.


누군가는 그리 말하고는 제 길을 갔습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사막에 정적이 내려앉았습니다. 사막에서 산책이라니.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상식 밖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순식간에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쓰러진 자전거를 가만히 일으켜 세웠습니다. 안장에 앉았습니다. 의자 높이를 조절하고 핸들을 그러쥐었습니다. 옷무새를 정돈하고 페달을 밟았습니다.


제 걱정과 달리 낡은 자전거는 모랫길도 막힘 없이 굴렀습니다. 보기보다 좋은 자전거인가 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자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습니다. 시원스럽게 머릿결이 살랑거렸습니다. 따가운 줄 알았던 볕은 따스하게 저를 비추었습니다. 자전거 운전은 생각보다 체력 소비가 컸습니다. 보조 바퀴를 떼어내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 쉽게 쉽게, 금방 금방 할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힘들게 오아시스를 찾은 줄 알았는데 신기루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상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오아시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비가 내리기도 했죠. 가끔은 이유 없이 소리 내어 웃기도 했습니다. 앞을 향하기도 했고, 뒤를 향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 뒤라고 할 건 없죠. 사막에 앞뒤가 어디 있답니까? 제가 정면으로 보는 곳이 앞인걸요.


한날은 같이 갈 동료가 생겼고, 한날은 예쁘장한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결국엔 각자의 길을 따라갔기에 지금은 저 혼자 남았지만. 뭐, 어떻나요. 저를 떠난 이들도 혼자 가는 길인걸요.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즐거웠습니다.


바람결이 즐거웠고, 밤하늘의 별이 즐거웠고,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이 즐거웠고, 신기루가 즐거웠고, 매일 보는 모래 언덕이 즐거웠습니다. 단지 저의 의지로 앞을 향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살만했습니다.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디를 향하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냥 계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갈 뿐입니다.


저기 보세요. 저기 붉은 바위 뒤에. 오아시스의 야자수 잎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근데 또 신기루면 어떡하죠?

또 신기루일 수도 있겠죠.


저는 호탕하게 웃으며 발로 페달을 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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