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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진 Feb 16. 2023

Lost boy

MUSIC

Lost boy - Ruth B



 

 오늘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섬나라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은 조금 짜증이 날지도 모릅니다. 당최 필자라는 놈은 말이야. 매일 말 같지도 않은 말이나 지껄이고 말이야. 썩 영양가 없는 글이나 올리고 말이야. 그런 평가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참 미안한 일이기에 미리 고개 숙여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불량 식품 같은 글이라도 말입니다. 제가 사는 섬나라를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니 어쩔 수 없습니다. 글은 통로이자, 창문인걸요. 그 수상한 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글 올리는 날이 아닌데도 이렇게 급하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요. 그러니 마음을 너그럽게 가라앉히시고 들어주십시오.


세상 어딘가에는 혜진 나라라는 곳이 있습니다. 처음 듣겠지만 이는 명백히 존재하는 유형 국가입니다. 지도를 가지고 설명하라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죠. 이곳은 버뮤다 삼각지대의 정중앙 아래에도 있고, 마리아나 해구 위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 아마도 히말라야 분지의 나무 그림자 근처에도 있습니다.


이 국가는 국민과 대통령과 묘지기로 이루어졌는데, 총인구는 1명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글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이곳의 대통령은 박혜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이곳의 국민도 박혜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이곳의 묘지기도 박혜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이해되시나요?


그래서 총인구 1명, 직업은 3개입니다.

그래서 총인구 1명, 페르소나는 3개입니다.


사실 이 섬나라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다들 있잖아요. 타인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자신 고유의 영역. 자아. EGO. 영혼. 고독의 섬. 흔들리는 섬.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섬. 혜진 나라도 그런 부류입니다. 가끔은 손을 내밀어줄 피터팬을 기다리기도 하고, 슬픈 빗방울에 점령당하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곳. 다른 사람들의 섬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잘 모릅니다. 그러니 그냥 제 섬 이야기나 해드리겠습니다.


저의 섬은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저의 기억이 묻혀 있고, 그건 묘지기인 제가 스스로 묻은 것입니다. 공동묘지의 이름은 트라우마라고 지어줬습니다. 혜진 나라의 문자는 한글과 비슷한 듯 다릅니다. 그래서 문자로 쓸 때는 트라우마라고 하고 수치심이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묘지는 늘 어둠으로 덮였으면 좋겠습니다. 반딧불이도 길을 잃었으면 하고, 밝은 빛조차 방황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아무도 찾아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구도 이 묘지를 벗어나지 못했으면 합니다.


여기서 ‘누구도’는 누구냐고요? 그건 이곳에 출몰하는 좀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망자. 죽지 않는 산자.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묘지기는 이 좀비를 때려눕히는 일을 합니다. 동그랗게 배가 부른 무덤에서, 종종 아주 수치스러운 기억 좀비들이 튀어나옵니다. 그건 과거에 머무른 것일 수도 있고, 과거와 샴쌍둥이처럼 몸이 붙어버린 현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과, 미성숙한 현재가 트라우마가 되어 묘지기를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좀비가 튀어나왔습니다. 그 녀석의 이름은 자만. 교만. 거들먹거림입니다. 이들은 몸이 하나. 머리가 세 개입니다. 이들을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는 나약함. 열등감. 두려움입니다. 이 녀석들만큼은 영원히 잠들었으면 하는데. 제 바람과 달리 아주 자주 나오는 녀석입니다.


글쎄 들어봐요. 오늘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사는 어떤 사회에 후배가 생겼습니다. 저는 선배랍시고 들떠서 꼴사납게 거들먹거린 겁니다. 챙겨준답시고 하는 말들이 온통 깔보는 말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후배 아이는 참으로 강단 있는 아이더군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이더군요. 눈빛에 자신을 지키는 위압감이 묻어 나오더군요. 그 기세에 저는 추하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 후에 후배 아이가 미워졌습니다. 아니, 제가 미워졌습니다. 부끄러워졌습니다.


제 교만이. 자만이. 거들먹거림이. 나약함이. 열등감이. 두려움이. 모든 것이. 혜진 나라가.


저의 공허는 순식간에 깊어졌습니다. 작은 섬나라는 수치라는 심해에, 단번에 침몰되었습니다. 무엇도 저를 끌어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뻗을 수 없게 잠겨버렸습니다. 그나마 여러분에게라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드디어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피터팬은 눈이 공허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민다지요. 아마 피터팬은 영원히 저를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내밀어지는 손길이 영원히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야 저는 아주 아주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모르죠. 사실은 피터팬이 제 섬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부끄러워서 낯을 가리느라 걸음이 느려진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처럼 피터팬이 발을 디딜 창문을 열어두겠습니다. 이렇게라도 해두면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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