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정 많은 까칠남

by 밀린 여유

정다운 사람도 좋지만, 툴툴 거리면서도 은근히 배려해 주는 사람은 매력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적절하게 부를 수 있는 대명사가 없었는데, 요즘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영리하다.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가려운 부분을 한 번에 싸악 긁어주는 말들을 잘도 만들어 낸다. 그중에 츤데레나 까칠남(녀)은 단연 가슴 설레는 단어들이다.


전에 스웨덴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스웨덴식 유머 코드가 은근히 내게 맞는 것을 느꼈다. 백세 노인의 거침없는 행보와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 또한 인상적이었다. 깊은 생각을 하게 하거나 삶의 교훈을 건질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지난한 삶 중에서도 웃음을 발견할 일들이 꽤 있구나… 하는 의외의 신선함이 있었다.


그 요나스 요나손이 추천한 책이 ‘오베라는 남자’이다. 표지가 코믹스럽고 100세 노인과 연장선상에 있는듯 하여 내 다이어리 뒷면의 도서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 책을 구입하는 건 손쉬운 일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는 한국 서점들도 있고 무료배송도 가능하겠지만, 일단 내가 사는 조지아주에는 배송비가 책값의 70%가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영어로 된 책을 구해서 읽는다는 건 이미 휴식이 아님을 뜻한다.


얼마 전부터 지친 내게 선사하는 금요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의 두 시간의 여유.
예전의 나는 책 먼저-> 영화 나중의 순서를 잘 지켜야 마음이 편한 평범한 구경꾼이었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것부터!’하게 되는 데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일단은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인 츤데레에 어울리는 ‘오베’라는 남자.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혈기가 왕성하고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좀 더 어른 대접을 받으셔야 할듯한. 40여 년을 성실하게 다닌 일터에서 내쫓기다시피 나온 오베는 그리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말쑥히 차려 입고 외출 준비를 한다. 그 외출은 다름 아닌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사랑이었던 ‘소냐’가 없는 세상에서는 직장도 집도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다. 언제라도 부인 곁으로 갈 준비가 되었던 오베는 거실 천장에 목을 매달을 줄을 달아놓고 기다리던 상태였다. 어쩌면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상 직장을 결근하는 게 싫어서 여태 무의미한 삶이지만 이어왔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직장에서 조기퇴직을 당한 직후에 비로소 실행에 옮기려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 게 아닐까. 더 이상 미련도 후회도 없듯이.


그런데 목을 매려 할 때마다 오베의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웃으로 이사 온 젊은 이란 부부. 그들에게는 딸아이가 둘이 있고 부인은 현재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운전이 서툰 남편이 오베 씨의 우체통을 들이받자, 죽음을 잠시 보루 하고 일 처리를 하러 밖으로 나온다. 이때부터 한 명씩 오베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며 오베가 죽으려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딴지를 걸어온다.

사실 세상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평소대로 무시하고 원래 계획대로 부인을 따라 가면 그뿐 일 텐데도 오베는 놀라우리만치 사람들을 돕는 데에 적극적이다. 물론 얼굴 표정은 친절하지도 않고 화가 잔뜩 난 상태이다.


그렇게 죽을상을 해가지고 남을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베같은 까칠남에게 기본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반 사람들 이상으로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이 까칠한 사람들의 반전 매력이다. 오베가 기존 까칠남과 약간 다른 점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신을 희생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위해서? 바로 질서를 위해서다.


오베는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자신의 작은 마을 입구에 차량이 진입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는다. 아무도 시킨 일이 아니니 의무도 책임도 없다. 그런데도 차량 진입을 막고자 자신의 ‘부인 따라가기’ 계획을 계속 미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정해 놓은 질서를 지키는 것에 집착하는 것에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작용한다.


어렸을 적,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말수가 적은 아버지와 밋밋한 생활을 한다. 별로 정을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오베를 잃을 뻔한 기찻길 사고 이후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둘만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엄마의 빈자리를 서로가 채워가며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우수한 성적표를 받아 들은 아버지는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을 하고 동료들에게 자랑하던 가장 행복한 그 순간… 아버지가 기차에 받치어 죽게 된다. 오베의 또 하나의 세계가 깨진 것이다. 둘이 잘 유지 해온 평화스러운 나날들이.


불행과 행복은 서로 오며 가는 것. 오베의 닫힌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온 ‘소냐.’ 그에게 다시 살아가도 좋을 이유가 생겼다. 이번에는 이 상태를 유지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 하지만 아이를 가진 소냐가 사고로 아이와 자신의 두 다리를 잃게 된다. 이번에도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에 차량 사고가 나서 오베의 행복에는 또 금이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경우 불행은 우리가 원인을 제공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의 친구인 셀레스트가 말했듯이 불운은 불운이다. 불운한 사고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베는 이런 일련 의사고 들을 외부에서 찾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며 더 철저히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본능이다. 자신의 불행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불운에도 정의감을 불태우며 그들의 평화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처음에 부인을 따라 죽으려 했을 때에는 오베 곁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오베의 죽음을 우연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막고 싶은 사람들로 변해버린다.


오베가 더 오래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행복한 삶을 누리 기를 희망했지만, 오베가 가장 행복했을 때 그들을 떠난 것이 오베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는 늘 최고의 순간에 이별을 하곤 했었으므로...

어릴 때 아버지가 오베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아내를 잃은 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며 아들을 바라보던 눈빛. 오베가 죽기 전에 이웃집 꼬마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며 똑같은 대사를 한다. 사랑하는 소냐가 없어도 그냥 이렇게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사는 것. 그래, 사는 게 이런 거구나……하는 자조적인 읊조림.


오베는 그렇게 그들 곁을 떠났다. 아주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사는 맛이 어떤 건지 알고 떠난 것이다. 이제 그토록 그리워하던 소냐 곁에서 이웃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하다. 여전히 그 이웃의 질서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눈을 부릅뜨고 불법차량이 진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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