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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Nov 15. 2020

밥통 앞에서 엄마들은 절망한다

기고 (2019. 3. 29. 시사인 게재)


엄마들은 밥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고 했다.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저녁밥을 챙기며 기다리던 아이가 없다.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엄마 밥 줘” 하면서 들어와야 하는 내 딸, 내 아들이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들은 밥통 앞에서 절망한다.


영화 〈생일〉 시사회에서 밥통 장면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그렇게 먹먹했다. 거의 다 내가 직접 목격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위해 직접 자원봉사를 해서 그런지 세밀한 것까지 섬세하게 고려해서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고 배우들도 유가족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연기를 해주었다.

밥에 대한 죄책감, 동생의 트라우마, 어머니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과 생일 당일 묘사 등 내가 당시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이종언 감독은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들을 위한 생일 모임을 열 때면 ‘치유공간 이웃’에서 설거지를 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 틈틈이 기록 사진 촬영도 맡았는데 이렇게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2017년 세월호 다큐멘터리 〈친구들:숨어 있는 슬픔〉을 제작했다. 유가족을 옆에서 관찰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 경험도 있어서 이들의 심정을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담았다. 영화를 제작할 때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와 지속적으로 교감하고 유가족을 상대로 한 시사회 뒤에는 이들의 요구대로 일부 장면을 편집했다.


시사회에 함께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영화의 장면이 실제와 거의 똑같다며 본인들의 심정을 잘 헤아려주었다고 평가했다. 한 유가족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를 불쌍하게 보지 않고 우리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하루하루 견디는 이유를 매일 조금씩 찾아나가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생일〉을 보면서 그동안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지금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갑자기 잃었을 때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 마음과 가족·이웃·사회는 예전과 그대로일까. 나는 과연 예전처럼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위험 사회를 살고 있다. 위험은 일상이 되었고 우리 모두 어느 순간 위험에 노출되어 엄청난 고통을 마주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내가 어떻게 해야 무너지지 않고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갈 수 있을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사회 역시 참사의 고통을 직면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한 공감의 역사가 일천하기에 어떻게 해야 고통을 줄일 수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조차 지켜보려 하지 않고 재촉하며 “지겹다” “빨리 잊고 잘 먹고 잘 살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국가의 잘못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정부가 앞장서서 짓밟고 모욕을 주고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고통의 우열을 따지고 정치적이라 폄하하며 더 큰 상처를 준다. 이런 대한민국에서 고통 받는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2014년 5월부터 7월까지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났다. 유가족들은 집에 있으면 미칠 것 같다며 아이들의 분향소 옆에 있는, 그다지 쾌적한 공간도 아닌 유가족 컨테이너에 매일 나왔다. 그곳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순남(전도연)과 정일(설경구)을 만났다.


영화 〈생일〉의 순남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아무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유일하게 순남을 안아주고, 순남과 남은 순남의 딸을 지켜주는 이는 이웃집 엄마다.  


정일은 아이에게 해준 것도 없고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은 아빠다. 갑자기 오지 않는 아이를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보낼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울고 기도를 하고 진상규명을 외쳐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밥을 먹는 일도, 밥을 먹겠다고 밥통의 단추를 누르는 일도 죄책감이 든다. 숨 쉬는 것조차 죄책감이 느껴진다. 순남이 그러하듯 챙겨야 할 다른 가족이 있기에 억지로 힘을 내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일상을 이어갈 뿐이다.


일상을 예전처럼 받아들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현실에서 세월호 피해 학생들의 엄마와 아빠들은 순남처럼 혹은 정일처럼 저마다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그러다 아들의 생일이 다가온다. 기일은 슬퍼하는 날이지만 생일은 기뻐하는 날이다. 아이가 기뻐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가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순남도 아들의 생일 파티를 생각하지만 생일 파티를 해주겠다는 치유공간 이웃의 대표와 이웃집 엄마에게는 화를 낸다. 남편의 설득에 함께 간다. 그곳에서 순남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들의 친구들과 이웃을 만난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지만 순남은 그 순간 가족과 이웃들과 공감하며 잠깐이나마 고립과 고통을 내려놓는다.


노란 옷을 입고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도 어둑어둑한 저녁 집으로 돌아가 지친 몸을 누이는 순간 순남과 정일처럼 고독했을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를 그리워하고 작은 기척에도 아이가 온 것이 아닐까 기다리고 때로는 끝도 없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고. 이런 부모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남겨진 동생은 자신의 아픔도 봐달라며 울 틈도 없이 엄마 아빠를 보살핀다.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 씨랜드 화재 피해자, 대구 지하철 화재 피해자 등등 참사가 유난히도 많은 우리 사회에서 숨죽이며 고통을 떠안고 살아온 피해자들의 모습은 〈생일〉의 순남과 정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 피해자가 되었을 때 겪게 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아름다운 봄날에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특히 슬픈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직면하기보다 외면하는 데 익숙하지만 공감은 고통을 직면하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힘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용기를 내어 봄날의 햇살처럼 공감하는 이웃이 된다면 우리 사회도 서서히 공감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공감이라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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