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영 Oct 16. 2021

24시간이 모자라

2019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Spring - 쇼도시마(2)

본격적으로 쇼도시마 여행을 하는 날. 원활한 이동을 위해 진작에 예약해 둔 렌트카로 다니기로 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토노쇼항(Tonosho Port)인데, 기왕 차도 있으니 섬 한바퀴를 다 돌고 싶었지만 중간중간 예술 작품까지 보려면 하루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간장마을(Hishionosato)-사카테항(Sakate  Port)-미토반도(Mito Peninsula) 로 이어지는 섬의 남쪽 지역들만 돌아보기로 했다.


출처 : 세토우치국제예술제 홈페이지 (https://setouchi-artfest.jp/en)




쇼도시마는 과거 간장 및 조림 산업이 번창한 곳으로, 국도를 중심으로 간장과 조림 공장이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산업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간장 마을'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마을에 들어서면 정말로 진한 간장 향기가 난다. 아직도 마을 곳곳에 간장 공장이나 창고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마을 안 쪽에서 일본의 유명 간장 브랜드인 마루킨 간장 박물관이 있는데 별로 흥미는 없어서 기념품샵에서 파는 간장, 장류 구경만 하다가 금방 나왔다. 간장맛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은 아는 맛만 먹는 것으로...

근대화산업유산이자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마을의 오래된 간장 창고

이 마을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프랑스 설치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조르쥬 루스가 오래된 민가 공간을 활용해 만든 조르쥬 갤러리였다. 대문을 통과해 좁은 오솔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벽에 칠해진 알 수 없는 금색과 만나게 되는데, 점점 집 안으로 걸어들어가 거실 중앙에 섰을 때 거실 한복판에 커다란 금색 구가 등장하게 되는 마법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번쩍거리는 금색은 금박지를 하나하나 붙여 구현한 것이라고 하니 또 놀랄 수 밖에..

Shodoshima2018@Georges Rousse

지은지 약 100년이 되었다는 이 집에선 오랫동안 노부부가 거주하다 돌아가셨는데, 작품이 전시된 공간을 제외하면 집 곳곳에는 주인분들의 물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조부모님의 집을 갤러리로 내어준 나이 지긋한 손주분이 작품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집 안 물건이나 조부모님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주시는 모습도 좋아보였다. 일본도 고령화 사회를 살며 도시가 아닌 지역은 비어 있는 가옥이 많은데, 사는 사람이 없으니 부수거나 낡아갈 일 밖에 없는 텅 빈 집이 이렇게 오래오래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멋진 일이다.


2 다락으로 가면(예전에  다락은 간장 보관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역시나 올라가면 진한 간장 냄새가  끼쳤다) 벽에 프로젝터라도  것처럼 하얀 스크린 같은게  있는데, 조금만 자세히 보면 여기도 분필로 촘촘하게 선을 그어 두었고, 관람객의 시선이 움직이던 중 의도한 모양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조르쥬 루스의 작품은 대부분  사라질 건물에서 작업,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 이렇게 작업 현장이 오래도록 남는 경우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조르쥬 루스가 일본에서 진행한 다른 작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 아담한 집이지만 천천히 시간을 보낼  있다. 별채 건물은 카페로 만들어서 갤러리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이용하도록 해두었다.

Shodoshima2018@Georges Rousse

오늘의 여행은 어제 받아둔 예술제 패스포트를 개시하는 날이기도 했다. 각 예술작품마다 스탬프가 준비되어 있어서 패스포트에 우리가 감상한 작품들을 기록할 수 있는데 앞으로 세 시즌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지가 예술제 여행의 큰 목표 중 하나였다. 세토우치 예술제의 작품들은 대부분 무료 관람이지만 일부 작품의 경우 추가 관람료를 내야 하는데 이 패스포트를 가지고 있으면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체류 기간이 길거나 유료 작품 위주로 관람한다면 패스포트 구입 금액 만큼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조르쥬 갤러리와 간장 마을 곳곳의 크고 작은 설치 작품들을 구경한 뒤에 처음 느끼는 스탬프 손맛에 즐거워하면서 근처 사카테 항구 근처에서 재빨리 스탬프 2개를 추가로 획득하고 다음 목적지인 '24개의 눈동자 영화촌'으로 향했다. 

세토우치 예술제 패스포트. 가끔 작품보다 도장 찍기가 우선이었던 때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24개의 눈동자 영화촌'은 일본의 고전 영화인 <24개의 눈동자>의 촬영지를 개축하여 일본 영화, 문학 테마파크로 만든 곳이다. 목조로 만든 학교 건물이나 마을이 쇼와 시대(일본의 1930년대~1980년대) 초기의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유명하다는데, 예술제가 없을 때도 쇼도시마의 인기 관광지라고 한다. 영화촌 안에는 작은 영화관도 있어서 이 곳에서 촬영한 <24개의 눈동자>를 틀어주고 있었는데 방금 바깥에서 보고 온 풍경들이 흑백 영화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잠깐 신기하기는 했지만, 쇼와 시대의 추억이나 정보가 부족하다보니 오히려 건물 하나하나를 둘러보는 것보다는 영화촌 안에 있는 소면 가게에서 따끈한 카레 우동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한숨 돌렸던 것이 더 좋은 추억이었다.

거대한 코이노보리. 남자 아이의 성장과 출세를 상징하는 잉어 깃발을 어린이날 즈음 만들어 둔다고 한다.




부지런히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촌까지 보고 나오니 벌써 오후 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섬 지역이라 육지를 오가는 마지막 배가 떠난 저녁 6~7시 사이엔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아서 미토 반도까지 들렀다가 다시 도노쇼 쪽으로 가서 저녁 먹을 생각까지 하면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항상 여유로운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결국은 하루 종일 촘촘하게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둘러 달려간 미토 반도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해안가 오래된 집터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 오두막을 지어 잠시나마 나무 위에서 놀고 싶어하던 어린 아이의 마음을 느끼게 해줬던 작품도 있었고, 바다를 향해 나팔 모양의 커다란 설치물을 통해 나무로 지어진 작은 건물 안에 있어도 철썩이는 파도 소리, 흘러가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품도 있었다. 유명 관광지 근처가 아닌 작은 해안가 마을이라 오가는 주민이나 관광객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래도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는 감각 덕분에 마음이 더없이 차분해졌다. 


오늘 일정을 짤 때도 알고 있었지만 미토 반도까지 돌아보니 그래도 쇼도시마가 카가와현에서 가장 큰 섬인데 역시 하루 반으로는 택도 없는 일정이었다는 게 실감났다. 미술 작품도 작품이었지만, 동서남북 섬 구석구석 구경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시간은 턱없이 짧기만 했다. 미처 가보지 못한 섬 뒤편은 언젠가 마저 돌아볼 수 있겠지... 당장 내년이면 또다시 예술제 시즌이 돌아오는데 과연 무사히 열릴 수 있을지, 우리가 다시 세토우치 바다를 만끽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항상 내 요청대로 성실한 모델이 되어주는 고마운 남편

저녁을 먹기 전 관람시간 종료 직전인 작품을 하나 더 보고(정말 패스포트 스탬프 채우기에 진심이었던 우리들) 쇼도시마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이니 큰맘 먹고 좋은 식당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어제 저녁을 해결했던 라면가게 근처에 평점 좋은 일식집이 있었다. 예약도 없이 찾아갔는데 다행히 조용히 식사할 수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 받아 하루 종일 걷느라 힘들었던 다리도 쭉 펴고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맞이해주시는 종업분들의 친절함과 정갈한 음식 덕분에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았다. 

시마카츠(島活)식당의 정식 메뉴와 운전자를 위한 무알콜 맥주의 조합




든든하게 저녁까지 먹고 나니 어제 숙소로 돌아올 때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하루종일 함께해서 정들었던 하얀색 렌트카를 호텔에 반납하고 토노쇼항 앞 벤치에 앉아 저물어가는 하루를 배웅했다. 하늘과 바다가 오렌지빛으로 반짝이다가 점점 까맣게 물들어간다. 이 풍경을 잊지 못해서, 바쁘게 움직이던 섬마을이 노을이 떠나는 속도에 맞춰 조용히 잠드는 시간이 그리워서 우리는 이 곳에 돌아왔나보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녀 몸은 힘들었지만 우리는 같은 곳을 또다시 선택한 이번 여행이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확신했다. 한번 더 촘촘하게 색칠한 예술제의 추억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줄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둠이 다 내려앉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익숙하지 않은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 종일 구불구불 해안 도로를 달린 남편은 잠깐만 쉰다고 하더니 금방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며 하루의 피로를 날려 보냈다. 예전엔 목욕탕 온탕에서 1분 참는 것도 힘들어 시계 초침만 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너무 피곤하거나 찬 바람이 불면 뜨끈한 온천 생각이 절로 난다. 집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놓는 걸로는 채워지지 않는 뜨끈함이 그립네.

올리브잎을 모티브로 만든 최정화 작가의 <태양의 선물>




육지로 나갈 마지막 배가 손님들을 태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이틀간의 계획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짜피 봄, 여름, 가을 시즌을 모두 오기로 한 상태여서 이번엔 몸 풀기로 익숙한 쇼도시마와 타카마츠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정했는데, 막상 여행을 준비하다보니 욕심이 생겨 가능한 많은 섬에 가볼 기회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예비 스케쥴로 여러 조합의 당일치기 일정을 가져왔던 터였다. 

머릿 속에선 벌써 남은 이틀에 대한 6개 계획의 시뮬레이션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주하는 나를 막아주는 건 남편 밖에 없으니, 잠에서 깨어나는대로 설명하고 최종 결정을 부탁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돌아온 그 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