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8일(수) 낮에는 하이라인, 잠에는 웨스트빌리지에서 맨해튼 만끽
숙소에서 15분 걸어 허드슨야드 빌딩에 갔다. 햇살 좋은 날 엣지 전망대에 올라 밝게 빛나는 맨해튼을 보고 싶다. 관람 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 허드슨야드 빌딩 2층 블루보틀 커피숍에 왔다. 블루보틀 맨해튼에 처음 왔다는 걸 밝히고 블루보틀 최고의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싱긋 웃으며 내 커피 취향을 한참 묻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커피 품종은 기억나지 않지만 맨해튼에서 마셔본 커피 중 최고였다. 커피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일어나 엘리베이터 타고 엣지 전망대로 향했다. 허드슨야드 빌딩 앞에 있는 베슬은 닫혀 있어 오르지 못했다. 베슬은 건물 앞에 솟은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계단으로 오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으나 자살 사고가 이어져 계단을 폐쇄했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엣지 전망대로 바로 올랐다. 두꺼운 유리로 사방을 둘렀으나 하늘은 열려 있어 개방감이 뛰어나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맨해튼은 눈부셨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날 맨해튼은 근사했다. 보호 유리가 데크 쪽에서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유리 앞에 서면 고층 건물 밑으로 낮은 건물 사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월스트리트 초고층 빌딩들이 솟고 그 오른쪽으로는 허드슨강이 흐른다. 강 너머로는 뉴저지가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센트럴파크가 초고층 빌딩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그 앞 건물 너머로 올라선다. 엣지 전망대에서는 허드슨 강변에서 맨해튼 동쪽과 남쪽 건물군과 주택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톱오브록보다 전망이 훨씬 시원하고 예쁘다.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와 서둘러 빠져나왔다. 자유의 여신상 랜드마크 크루즈 탑승 시간을 예약하기 위해 허드슨 강변에 있는 크루즈 선착장으로 갔다. 예상외로 탑승객이 적어 바로 탈 수 있었다. 배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월스트리트를 바라보며 다시 이스트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브루클린 다리 밑을 지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서쪽 면에 보일 때까지 가더니 방향을 틀어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했다. 횃불 든 녹색 누나 앞을 지나 다시 허드슨 강변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총 1시간 30분 걸렸다.
크루즈 투어는 강변이나 해안에 인접한 맨해튼 랜드마크들은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 낮에 오른 엣지 전망대에 관람객들이 모여있는 모습도 보였고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남쪽 끝 리틀아일랜드 공원이 가까이 다가왔고 월스트리트 고층 건물군도 빽빽이 붙어 멋진 스카이라인을 연출했다. 브루클린 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브루클린 명물 덤보가 듬직하게 서 있고 명소로 떠오르는 브루클린 해안가도 가까이 보였다. 허드슨강 타고 오르면 맨해튼 맞은편으로 뉴저지가 있다. 한때 그곳에서 연수받은 적 있어 낯익다.
크루즈에서 내려 하이라인으로 이동했다. 옛 고가도로를 개조해 도심 속 산책로를 조성했다. 서울시가 서울역부터 명동까지 이어지는 고가도로에 조성한 서울로 7017 원조격이다. 허드슨야드 옆에서 맨해튼 남부까지 이어지는 상당히 긴 산책로다. 도심 빌딩 사이를 통과해 고가 양옆으로 허드슨강과 맨해튼 서쪽 주택가를 조망하며 걷는 게 좋았다. 산책로 중간에 아기자기하며 예쁘게 생긴 스튜디오형 집들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작은 스튜디오형 집의 가격이 수백억 원이라고 한다. 뉴욕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하이라인은 참 예쁘고 편리하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명소를 하나로 연결했다. 허드슨야드 앞 베슬이 출발지에 있고 중간에 풀턴하우스나 첼시마켓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산책로 말미에는 휘트니미술관이 자리하고 거기서 조금만 허드슨 강변으로 나가면 버섯 모양의 기둥이 떠받치는 강변 공원 리틀아일랜드가 있다. 리틀아일랜드는 강 위에 버섯 모양의 기둥으로 받치고 그 위에 숲을 조성해 늘 관광객과 시민들이 북적인다. 전망대에 오르면 허드슨강과 멀리 맨해튼 남서부를 조망할 수 있다. 강에 접한 원형 무대에서는 날마다 석양이 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연인이나 가족이 가득하다. 정신없이 돌다 보니 홉 브라이스와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리틀아일랜드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인 웨스트빌리지로 뛰다시피 하며 걸었다.
홉 브라이스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텍사스 걸이다.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하길래 군에서 배운 방식대로 바늘과 실로 치료하면서 친해졌다. 그 뒤로 한참 함께 걸었다. 체력이 뛰어나 내 걷는 속도를 따라왔다. 홉은 맨해튼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고 있다. 한국인 남자친구와 3년째 사귀고 있다. 내가 뉴욕에 왔다고 왓츠앱으로 알리자 단숨에 보자고 달려 나왔다. 한국인 남자친구도 데리고 나왔다.
한국인 남자친구는 노벨상 의학상 수상자 제니퍼 다우드나에게 공부한 수재다. 버클리에서 유전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콜롬비아대에서 유전자 가위 분야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다.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로쉬나 모더나 같은 제약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업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에서 4~5년 공부한 뒤 한국에 들어온다고 한다. 한국 유전공학을 이끌 인재를 만난 셈이다. 열 살에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한국어도 잘한다. 말도 잘 통한다. 서글서글하고 똘똘하다. 나중에는 홉보다 남자친구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냥 봐도 예쁘기 그지없는 젊은 커플들이 이끄는 대로 웨스트빌리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우리네 홍대입구처럼 웨스트빌리지는 밤마다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다. 홉 덕분에 이런 곳에 온 거다. 평소라면 밤에는 숙소에서 여행기 정리하고 그냥 잔다. 매운 음식 좋아하는 취향을 알고 사천식 중국 요릿집에 가서 여러 음식을 주문했다. 밥 한 그릇 추가로 맛있게 먹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홉이 계산했다. 식사 마치고 재즈공연을 보러 갔다. 스몰스라는 재즈 카페인데 웨스트빌리지 주민들만 아는 작지만 품격 높은 재즈 공연장이라고 한다. 백발의 재즈 연주자 6명이 중년의 드러머와 함께 열정적으로 공연하는 모습을 드러머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공연 끝나자 홉이 비밀스러운 장소로 안내하겠단다. 햄버거 가게 파이브가이즈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배부른데. 이 커플도 저녁식사를 많이 하던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2층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키나 덩치나 여러모로 내 2배는 되어 보이는 흑인 형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식당 2층에 올라가는데 신분증이라니. 커플은 웃고 있었다. 둘이 뭔가 꾸미고 있었다. 여권을 보여 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햄버거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가 나타났다. 시끌벅적한 바에서 손님들이 카테일이나 맥주를 시켜놓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세워진 술집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금주법을 시행해 술의 제조와 판매를 막자 비밀리에 술집을 열어야 했다. 당시 전통에 따라 지금도 밖에는 간판을 내걸지 않고 1층 식당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은밀한 술집을 운영하는 것이다. 천장에는 팬이 돌고 바텐더가 바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고 조명은 어둡고 음악 볼륨은 엄청 크고 손님들은 서거나 앉거나 무리 지어 소리 지르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면이었다.
2층 술집에서 정신이 빠진 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이 피자 배달 알바를 했던 Joe’s Pizza집에 갔다. 영화 스파이더맨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나 피자 맛이 훌륭한 걸로 더 유명하다. 늦은 밤 피자 하나로 다 먹고 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홉 커플과 헤어졌다. 내년 서울에 다시 보자고 약속하고.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려 숙소로 바로 와서 씻고 뻗었다. 침대에 누워 홉에게 감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맺은 인연만으로 미국에서 친구 2명을 만날 수 있었다. 브라이언 집에 초대되어 고급 주택에서 맥주를 함께 마셨고 홉과는 웨스트빌리지 핫플레이스에서 맨해튼의 밤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인연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