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진보(대런 애쓰모글루)⟫를 읽고
최첨단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계로 치환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인간의 노동, 특히 단순 반복 작업들을 대체하는 상황이 가속화되면서, 노동자들은 늘 자신의 일이 언제 기계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살아왔다. 기술 개발에 따른 일자리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한 가지 기술을 익히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도 늘고 있다. 어렵게 획득한 기술이 정작 실력 발휘를 할 때가 되면 기계로 대체되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젊은 층 사이에서는 한 바구니에 달걀을 담기보다는, 여러 잔기술을 익혀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N잡러’가 10-20대들에게 호감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이러한 시류도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권력과 진보⟫에서 저자들은 모든 기술이 인간을 착취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며, 기술 개발의 방향은 철저히 사회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신기술이 노동자에게 새로운 업무 기회를 창출하거나 추가 이윤이 노동자들과 공유될 때,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하여 노동자들의 임금 향상과 권리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기계 공포증에서 해방시켜 주는 아이디어인 것 같아 귀가 솔깃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선택’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살펴보면 사회적 영향력이 약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기술 진보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 절대로 평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확보한 소수의 기득권층에 의해 결정되며, 이들이 발휘하는 ‘설득 권력’에 따라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기술이 개발, 도입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언제 기계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오래된 공포는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 소수의 기득권층이 더 많은 이득을 얻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미래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뒤집어 노동자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방향으로 선택을 돌리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회제도와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는데, 최근 SNS를 비롯한 IT기술은 민주사회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당하는 게 더 괴롭다. 필연이 아닌데 필연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는 상황에서 자기 목소리를 각인시킬만한 사회적 영향력도, 비합리적인 선택 구조를 뒤엎을 민주적인 수단도 없는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필연이 필연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부터 어려워진 현실에 있다.
어떤 기술이 좋은 기술일까. 우리 시대에 기술 진보의 방향은 어느 쪽으로 설정되어야 할까. 저자들은 기술이 인간이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간 학교 현장에서 각광받았던 ‘거꾸로 수업’이 대표적이다. ‘거꾸로 수업’은 학생들이 교사의 강의식 설명을 동영상으로 미리 보고 온 뒤 교실에서는 동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응용하고 확장하는 수업 방식이다. 교사는 똑같은 강의를 여러 학급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다양한 산출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해 정도에 맞는 피드백을 제공하고 학습 과정을 유연하게 구성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쓰이는 다양한 IT 기술들은 교사와 학생이 전보다 양질의 배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처럼 단순 반복되는 업무들을 기계가 대신하고 인간은 고차원적인 업무를 강화하는 것은 기계를 가장 이롭게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맡았던 일들에도 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있을까. 자동차 생산라인 노동자, 마트 계산원, 택배기사 등은 기계가 도입되는 순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제 당신들이 하던 일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였으니 새로운 일을 찾으라고 하면 되는 걸까. 정신노동에 비해 육체노동은 당연히 기계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저자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기계의 주요 속성이 ‘자동화’인데, 육체노동의 많은 부분은 자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자동화될 수 있는 부분을 기계에 내어주는 건 정당한 일일까. 손과 발로 하는 일들 또한 가장 인간적인 일 중 하나이지 않을까. 농부의 손을 거친 농작물과 기계의 관리를 거친 농작물을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트 직원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값을 치르는 경험과 바코드 인식과 카드 결제로 거래하는 경험은? 목적 달성뿐만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오가는 인간적인 교류는 생산성을 계산하는 수치에는 반영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조립라인 노동자를, 농부를, 계산원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이 사회에 유익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육체노동을 경시하고 정신노동을 신성시하는 사회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작고 단순한 일이라도 정성스레 손과 발을 움직여서 할 때에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기계에 맞서 지켜내려는 인간다움에는 주로 지성, 창의성, 사회성, 관계, 감정 등이 회자된다. 반면 육체노동은 고되고 위험하고 저차원적이기에 기계에 내줘도 되며 오히려 그 편이 이득이 된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린다. 육체노동은 정말 고되고 위험하고 저차원적일까, 아니면 사회 시스템이 이들 작업을 고되고 위험하고 저차원적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기를 기록한 책 ⟪그의 기쁨과 슬픔(정혜윤)⟫을 읽으면서 자동차를 조립하는 일에 새로운 인식이 싹텄다. 오랜 복직 투쟁을 이어가던 중,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시청 앞 농성장에서 자동차를 직접 조립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저자는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면서 놀라운 아름다움과 마주한다. 해고된 사실 못지않게 이들을 괴롭힌 것은, 매일같이 만지던 부품과 도구들의 감촉에서 멀어지는 것, 자신이 완성된 차를 바라보는 뿌듯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작가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해고된 괴로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잊은 채 조립 과정 자체에 몰입하며 발산하는 기쁨에 찬 표정들을 포착했다.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신나서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노동이 단순히 돈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 주는 기쁨이라는 점을 포착했다.
육체노동을 지식 노동보다 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안전과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일들에는 기계들을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만 따지며 손기술을 로봇에게 양도해도 된다는 생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지식, 창작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체노동에서도 인간과 기계 간의 적절한 협력 관계를 고민해야 하며, 협력 관계를 성립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만든 기준이며,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인류가 추구해야 할 기술 진보의 방향에 부합하는 게 맞는지 묻고 따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