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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Feb 01. 2024

클라라의 시선으로 본 인간, 인간의 시선으로 본 클라라

⟪클라라와 태양(가즈오 이시구로)⟫를 읽고

이 소설이 클라라의 목소리로 쓰여서,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담긴 이야기여서 좋았다. 인공지능이 인류에 미칠 영향을 떠올릴 때 대개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공지능의 기능과 한계, 위험 등을 떠올리면서 다시 물음을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로 옮겨가곤 하는데, 이 책은 반대로 인공지능이 인간 친구와 가족, 주변인들을 겪어내면서 알아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줬다. 그 덕분에 인공지능을 ‘적'으로 규정한 뒤 인간의 고유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평소의 강박에서 벗어나, 오히려 인공지능에 감정을 이입하여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겪어볼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쓸모를 다하고 야적장에 버려진 뒤 클라라는 말한다. 자신이 조시를 배워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가능했을 테지만,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 없었을 거라고, 그것을 이제는 분명히 안다고. 인간의 고유성은 결국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특히 친밀감을 느끼는 존재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이것이 클라라의 입으로 발화되는 상황이 왠지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클라라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인간보다 더 세심히 파악하고 이를 배려한 최적의 말과 행동을 구현하여 조시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위로한다. 클라라의 모습을 보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의 ‘베프'나 ‘파트너'의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서 배려해 주고, 감정에 휩쓸린 말과 행동의 이면에 담긴 진심을 헤아려주고, 역경이 있더라도 함께 희망을 갖거나 아니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 너무나도 완벽한 친구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런 친구를 만나는 행운은 대다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베프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인공지능 베프를 구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위로를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심연의 외로움이 채워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과 연인이 된다는 설정의 영화 <그녀(Her)>에서는 자신과 완벽한 짝이라고 생각했던 인공지능이 자기만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환상이 깨지지만, 에이에프는 인간과 흡사한 육체를 갖고 있는, 개인에게 독점적으로 헌신하는 인공지능이다. 육체를 갖고 있고 지능이 높으며 감정 또한 카테고리화된 상태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클라라가 쇼윈도에 진열되어 사람들에게 상품 대우를 받을 때(펫숍에 진열된 동물들이 떠올랐다), 인간들의 대화 테이블에 끼지 못하고 구석에 서 있을 때, 불안정한 인간들에 의해 감정 착취를 당할 때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베프'는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쌍방의 노력을 통해 성립될 수 있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대상에게 우리는 고마움도 느끼지만 부담도 느낀다. 그렇기에 어려울 때는 쉽게 기대어 도움을 받지만 상황이 해결되면 마음의 빚 때문에 일부러 상대를 등지기도 한다. 반대로 불완전한 두 사람이 감정 표현이 서툴거나 현실을 곡해해서 부대낌을 겪었더라도 적절하게 오해를 풀면 고난을 함께 헤쳐왔다는 자부심 덕분에 마음의 빚 없이 편안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 평등한 부대낌의 과정이 상대와 평생을 지속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정들이 곧 우리를 고유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결국 인간이 갈구하는 것은 나의 부족한 점을 완벽히 이해하고 채워줄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쓰이는 평범한 존재들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럼에도 이 책의 결말은 쓸쓸하다. 클라라는 왜 버려졌을까. 애당초 클라라의 역할을 조시에게 정서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한정하고 시작한 관계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때는 조시가 죽은 뒤에 조시를 대체할 인물로까지 여겨졌던 클라라를 조시의 건강이 회복된 뒤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조시와 주변인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클라라의 처지는 반려동물과 비교되었다. 반려동물은 인공지능에 비해 지능도 떨어지고 정서적 교감을 할 수는 있으나 클라라만큼의 배려와 희생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가 가족으로서 반려동물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 죽은 뒤에도 극심한 펫로스로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차이를 ‘육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고통과 피로를 느끼는 육체,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연민을 자아내는 육체에서 친밀감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나누는 것만큼 육체 간의 접촉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다시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을 느끼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경우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육체에까지 전달된다.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은 마음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몸과 마음을 나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감정을 하나의 기술처럼 이해하고 다룰 뿐, 이것이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말부에 클라라가 자신은 최고의 가족을 만났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이야기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은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조시 가족의 선택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로 한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감정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 그저 자신이 이해하고 분석해야 할 하나의 현상으로 여기는 걸까.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와 구별 짓는 것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감정과 육체가 연결된 상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흔히 인간은 감정적이고 인공지능은 이성적일 거라 생각하지만, 조시를 위한 클라라의 헌신은 그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조시의 목숨을 구하는 마지막 희망을 갖고 맥베인 씨의 헛간에서 태양을 향해 절절히 소원을 비는 장면에서 클라라는 태양이 자신의 소원을 하찮거나 과분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최적의 말을 고르고 태양에게 빈 소원이 다른 이에게 유출될 때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비밀에 부친다. 태양에 소원을 빌고 공해를 유발하는 기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 같지만 클라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이를 고수한다. 오히려 인간들은 현실적 한계를 느끼며 가장 이성적인 선택(대부분은 조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할 때, 클라라는 가장 감정적이고 미신적으로까지 보이는 방식으로 호소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클라라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이는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즉, 최선의 선택은 무조건 이성적일 수 없으며, 감정(특히 희망과 같은 강력히 긍정적인 감정)은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조차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만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은 감정마저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클라라에 감정 이입해서 인간과 인공지능을 나누려는 마음보다는 인간에 의해 차별받고 버림받는 인공지능의 처지에 더 마음이 쓰였다. 자기감정에 따라 클라라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들이 얄미웠고, 클라라가 외롭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글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클라라의 외로움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상황을 왜곡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클라라는 진심으로 행복했을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조시와 가족이 되었고, 조시의 건강 회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이제 조시는 자신의 도움 없이도 세상에 나갈 용기를 갖추었다. 클라라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품으니, 쓸쓸했던 클라라의 마지막 모습에 따뜻하고 강렬한 햇볕이 드리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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