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레리뇽 고원(매기 팩슨)⟫을 읽고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독서 모임에서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읽은 뒤 주변의 선인들의 이야기를 더 크게, 더 자주 스스로에게 들려줘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주변에 분명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훈훈한 일들은 자극적인 콘텐츠 위주로 노출되는 미디어 환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이것이 현실을 실제보다 더 부정적으로 왜곡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믿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들에 많이 노출되면 견고하게 자리 잡은 부정적 필터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래서인지 ⟪비바레리뇽 고원⟫을 읽으면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발굴하고 의심하고 다시 자기 믿음으로 끌어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여정에 더 이입되었다. 물론 내가 목격한 인간의 악함은 팩슨이 매일같이 접했던 홀로코스트 당시의 잔혹한 기록들, 선함의 표본이라 여겨졌던 고원에서의 끔찍한 살인사건 등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나 또한 세상에서 인기를 누리는 많은 이론과 이야기들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못마땅했고, 여기에 반기를 들고 싶지만 일상의 소소한 갈등에서도 쉽게 성악설로 기우는 마음 때문에 괴롭기도 했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네 안에 사랑이 없는데, 누구에게 뭘 베풀겠다는 거야?” 정곡을 찔려서인지 감정적으로 대응했지만, 혼자가 되어 이리저리 말을 곱씹다 보니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옳다고 믿고 해온 일들은 그저 머리로 이해했던 것들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었지만 속은 곪아있었다. 물론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하기 싫은 일을 의무감 때문에 참으면서 해낸 것 같았다. 그렇게 ‘선행'이라 믿었던 것들의 위선이 하나씩 발각되는 순간 엄청난 공허감이 찾아왔다. 그동안 도대체 나는 무얼 했던 거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너무나도 광범위하지만) '사랑'이라 믿고 실천하기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정작 사랑이 하나도 없었다. 팩슨은 비바레리뇽 고원에서의 경험을 정리하며, 세상에 신성한 사람이나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신성한 인간이 되고 신성한 장소가 된다고 강조한다. ‘사랑을 믿는 것’과 ‘사랑을 행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이 책의 전반에 펼쳐지는 다니엘 트로크메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다니엘은 계급적 지위에 걸맞은 직업을 갖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뿌리치고 나치 독일을 피해 온 유대인 난민들을 돕고자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향한다. “제가 모험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모험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때만 해도 다니엘의 사랑은 머리로 이해한 수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바레리뇽 고원에서 그가 보인 행동들에는 분명 아이들(귀뚜라미들)을 향한 사랑이 있다. 애틋함이 있다. 불안에 떠는 아이들에게 자장가처럼 책을 읽어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를 펼치도록 도와주고, 한밤중에 게슈타포가 들이닥쳐 아이들을 잡아갈까 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뒷산으로 도망가는 대신 순순히 붙잡혀가고, 수용소에서도 아이들의 ‘자세한' 소식을 궁금해하고 아이들에게 문장이 담긴 버튼을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애쓴다. 유대인을 숨겨주면 불이익은 물론 죽음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물도 음식도 공기마저도 부족한 수송열차와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은 도덕적 결정과 마주하고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다니엘 또한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가기로 한 순간부터 더욱 힘든 선택의 순간들과 마주하지만, 그때마다 자기 신념에 부합하는 선택을 한다. 만약 다니엘이 비바레리뇽 고원이 아닌, 유대인을 숨겨주는 데 인색한 도시들에 거주했다면, 계급 유지에 적합한 안정적이고 소득이 좋은 일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신념에 걸맞은 선택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유대인은 모릅니다. 사람을 알 뿐입니다.’ 고원에서 그들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속 시원한 반문이다!
비바레리뇽 고원의 사람들은 오랜 역사의 순간들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는 선택을 집단적으로 해왔고,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이 이 공동체의 후대 사람들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국적, 인종, 종교, 계급, 성별 등의 경계를 허물고 그저 같은 인간으로 낯선 이들을 대하고자 한다. 상드린의 말처럼 결국에는 “올바른 일이 벌어지리라는 믿음”, “상황이 마땅히 흘러가리라는 믿음”을 지키고자 한다. 전 세계가 극우화되고, 자국민 우선주의를 외치며 국경을 폐쇄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는 현 상황에서 경계를 허무는 마음은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팩슨이 중간에 토로하는 것처럼, 민족국가 개념 이전에 복잡하게 얽힌 이동과 교류 등을 토대로 보면 민족, 인종 등으로 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허구 개념에 갇혀서 인간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서슴없이 해댄다.
다시 다니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의 선량한 품성과 양질의 교육을 받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교류한 경험, 이로써 형성된 믿음을 꾸준히 실천해 낸 점 등은 그가 혹독한 상황에도 레 그리용 아이들과 동료들,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근력을 마련해 준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이 엄혹할수록 홀로 선한 믿음을 지켜내기란 어려우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지가 필요하다. 선한 의지를 실천하려는 공동체가 있다면 더욱더 수월해진다. 이 일을 수월하게 해주는 것 중 하나가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종교든지 훌륭한 메시지로 많은 이들을 규합하고 실천을 끌어낸다.(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종교를 갖는다는 것의 부담과 한계 때문에 나는 종교와 종교적인 마인드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탈을 쓴 권력과 탐욕을 마주한 적이 많아서 더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하나의 종교에 삶을 가두는 것과 종교적인 마인드를 갖고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니엘 또한 독실한 개신교도인 가족들과 달리 베이루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종교를 접하면서 서구 중심의 문명과 종교에서 벗어난 점이 그를 더욱 종교적인 인물(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만든 것 같다. 얀 마텔의 소설 ⟪파이이야기⟫에서 주인공 파이(파이도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다는 점에서 다니엘과 비슷하다)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파이가 벵갈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 300일 가까이를 버텨 살아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자 파이는 방금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폭력과 야만과 식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묻는다. 둘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냐고? 이 소설은 파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신을 믿게 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이야기들은 (과학적) 팩트인지 여부보다, 그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가 전하는 감동과 변화가 더 중요하다. 종교 경전에 수록된 이야기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학을 믿는다. 그러나 ‘바이 미어 비스투 셴(당신은 나에게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을 위한 공간이 없는 과학, 제1원리에 깊이 파고들어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신성한 장소를 찾아내지 못하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종교와 과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자연히 버리는 거라는 생각을 경계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모든 시대의 희망, 아이들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고원 마을에서 지역 주민들과 망명 신청자들을 이어주는 것은 보다 유연하고 보편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매개로 서로를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이 더욱 가까워지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지역예술가들의 지원으로 난민아이들이 선보인 그림자인형극을 보면서, 그리스의 한 도시에서 우연히 보게 된 시민 음악회를 떠올렸다. 지역 어른들과 아이들, 난민 아이들이 함께 준비한 합창 무대가 있었고, 곡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로 가득 찬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격식을 차린 무대가 아직 어색한 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에게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받는 박수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현지인의 가정에 초대되어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고 음식을 나누는 경험은? 아이를 매개로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하는 경험을 나누는 어른들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공동체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가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사회를 돌아본다. 부모의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에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배제되는 아이들의 처지를 떠올려본다. 이 아이들과 부모들을 우리 사회는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법적으로만 처리하려 해오진 않았나. 이들을 품어줄 사회나 공동체는 있었나. 유연한 사고로 한국문화를 흡수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혹하게 외면하진 않았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이야기는 최소한도로만 다뤄지거나, 그마저도 의미 없는 정보들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다. 어렵게 레이더망에 들어온다 해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기기 쉽다. 이주아동들을 민족과 인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동등한 인간으로 본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법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우리 사회에 약자들을 품을 만한 공동체가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다니엘은 수용소에서 귀뚜라미들(ㅎㅎ)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대가족은 아직 너무 어려서, 작은 나무처럼, 레 그리용으로 향하는 길에서 보이는 그 작은 전나무 묘목처럼 우리가 모두 잘 보살펴야 해. 부러지지 않도록 모두가 매일매일 여러 차례 보살펴야만 한단다.”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의 존재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연약한 존재들이 부러지지 않도록 살피고 챙기려는 노력에서 공동체는 시작되지 않을까. 거창한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난 작은 실천이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씨앗은 이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