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10. 육손 陸遜 (2)

by 남재준

1. 촉과의 외교, 위와의 전쟁


223년에 촉한에서 유비가 사망함에 따라 자연히 대권이 제갈량에게 넘어가니, 제갈량은 촉오 동맹을 온전히 복구했다.


손권은 육손에게 대촉 관계에 관한 권한을 사실상 일임하여, 손권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낼 때 육손에게 검토하도록 하고 설명해야 하는 바가 있으면 육손이 하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손권의 인새를 따로 육손의 근무처에 두었다.


5년 뒤인 228년에 오-위 사이에 석정 전투가 발생했는데, 파양태수 주방으로 하여금 위의 대사마 조휴를 속이게 하여 뒤통수를 치는 전략(사항계)이었다.


이때 손권은 육손에게 전권을 주고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조휴를 치도록 했다.


주방이 조휴에게 연신 서신을 보내 자신이 내부에서 군사를 일으킬 테니 외부에서 호응해 달라고 하니, 군권을 잡고 있던 조휴는 이를 믿고 남정한다.


육손이 도달했을 때 조휴는 사태의 진상을 알아차렸음에도 속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부끄럽고 정예병을 이끌고 기왕에 남정했으므로 육손과 맞붙어 보기로 했다.


조휴는 기습전을 택했으나, 육손은 이를 사전에 알아차린 듯하다.

육손은 주환과 전종으로 하여금 각각 좌익과 우익이 되도록 하고 자신은 중앙군을 맡아 조휴의 위군에게 강하게 맞부딪혀 들어가 깨뜨렸다.


위는 오에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조휴가 이 전투 후 사망했으므로 대장을 잃었다.


이 공으로 육손의 권력은 더욱 강해져 손권은 자신의 우산 덮개를 사용하고 궐문을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하사품 역시 손권 자신의 것과 같은 것들을 쓰도록 했다.

정사에서는 '그 당시에는 육손과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했을 만큼 220년대는 육손의 전성기라 할만했다.


2. 유가적 통치 철학의 사도(使徒)가 되다


229년에 정식으로 오(吳)가 건국되고, 손권(태조 대제)은 육손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에 손권은 회계에서 말릉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말릉을 건업(建業, 사업을 일으키다)으로 개칭한다.


건업은 회계보다 북서쪽에 있는데, 북진을 감안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위 직후 천도 직전에 손권이 건업을 순시하면서 그곳에 태자 손등, 황자, 및 구경을 머무르도록 하여 수도로 예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육손으로 하여금 태자를 보좌하고 이 일대의 제반 통치를 담당하도록 하여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인연이 생기게 되었다.


육손은 황족도 가리지 않고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손려(손권의 차남)가 오리 싸움을 구경하는 난간(鬥鴨欄)을 설치하는 사치를 부리니, 육손이 정색하고 이르기를 '당신은 마땅히 경전을 두루 살피고 새롭게 되도록 힘써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런 놀이를 하십니까?'라고 하니 손려가 즉시 그 물건을 철거하도록 했다.


또 손송이 군무를 담당하면서도 군사들을 훈련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니, 육손은 그 수하 관리들의 머리를 깎는 형벌을 내렸다.


손송은 손익의 아들이었는데, 손익은 손견의 삼남이고 손권은 손견의 차남이다.


즉 손송은 손권의 조카가 되는데, 손권은 손송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황제가 총애하는 황족의 업무 태만을 들어 그 수하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사실상 그 상관인 황족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고 나아가 황제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육손은 이를 단행하였는데 이때에는 손권의 육손에 대한 총애가 건재했긴 했지만, 행위의 의미와 육손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육손은 다스림에 있어 매우 엄했는데 이것이 보통 ’엄하다‘는 표현과 연결된 ’형벌‘ 즉 법가적 의미는 아니었다.


동시대의 인물 사경이 유이의 '형벌을 우선하고 예절을 뒤에 한다.'는 법가적 견해를 칭찬하니, 육손이 질책하며 말하기를 '예절이 형벌보다 앞선 지 매우 오래되었다. 유이가 궤변으로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은 모두 그릇되다. 그대는 현재 태자를 모시니, 인의와 음덕을 우선해야지 유이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육손의 유가적 견해는 손권에게 올린 시사에 대한 소에 대해서도 확인된다.


- 신은 법이 과하게 엄하고 상세해 아래에서 위법자들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수들이나 관리들의 죄는 물론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추궁을 받아야 하나,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대과가 아니면 은혜를 베풀어 아래의 불안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라면, 재능이 있으면 다시 불러올려 보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엄격한 법과 가혹한 벌은 제왕이 대업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니, 징벌만 있고 용서가 없으면 멀리까지 미치는 대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개 형벌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형벌은 어디까지나 수단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유가적 관점과 일치한다.


말하자면 인(仁)을 온전히 체화하고 실현하는 인간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면, 인간이 비록 모두 그러한 목적으로 갈 가능성을 품고 있어도 그와 반대로 가는 일이 세사에 너무 많으므로 이를 예(禮)로써 교화하여 인으로의 길을 함양하도록 하게 된다.


그런데 예만 가지고서도 어려운 점이 큰일이 세상에 많으므로, 결국 다시 예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부득불 형(刑)이 등장하게 된다.


대개 이러한 사상적 논리를 바탕으로 유가적 통치 체제에서도 예와 형이 양립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는, 특히나 삼국시대와 같은 전란의 시대에는 결국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것은 형이라는 사실을 모두 잘 알았다.


제갈량과 같은 통치자들도 형법을 엄중히 하였는데, 이는 끊임없이 무력을 중심으로 뒤집히고 다시 뒤집히는 세상 속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가 갖추어야 할 원칙과 덕목은 결코 '형이 예에 앞선다.'는 것은 될 수 없음을 육손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원칙과 덕목은 그것을 이루기 어려울수록, 또 어렵기 때문에 강조되는 법이다.


3. 신중하지만 행동력 있는 전략가


한편 육손은 호전성을 보이지 않았고,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절해야 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육손 역시도 전쟁과 전략이라는 측면에만 치중해 이해하는 경우 온전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손권이 교주 방면 다시 말해 오나라에서도 최남단의 섬 등을 공격해 복속시키려고 하면서 육손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육손은 이를 반대했다.


그의 소를 보면 기본적으로 단기적 군사력 보강보다 장기적 국력 향상이 더 중요하다는 요지를 알 수 있다.


- 아직 천하통일이라는 현재의 긴급한 임무가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의 힘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군사를 일으킨 지 수 년이 지나 인원이 감소하니 폐하께서 이를 우려하시고 (그들을 흡수해 쓰기 위하여) 남정을 하려고 하시나, 신의 생각으로는 이익이 더 크지 않습니다. 멀리 가서 땅을 얻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고, 풍토가 다르니 군사들이 병을 얻는 등 크게 고생할 것입니다. 또 그곳은 지형이 험준하고 이민족이어서 문화가 다르므로 다스리기가 힘듭니다. 그들을 더하지 않아도 아군이 줄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럼에도 출병한다면 도리어 손해가 더 크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강동에 있는 군사들만으로도 대업을 도모하기에는 충분하나, 단지 힘을 좀 더 축적한 연후에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본래 평정을 위해서는 군대의 힘에 의존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농업을 비롯해 생업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백성들의 일입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백성들이 곤궁한 상황이니, 민생을 살리고 조세를 낮추어 힘을 되찾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손권은 남정을 강행했으나,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요동의 공손연이 오를 배신하고 위에 고개를 숙이자, 손권은 격노하여 요동을 치려고 했으나 육손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대의견을 낸다.


- 지금 폐하께서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터뜨리는 것은 만인의 위에 있는 군주의 지위와 위엄을 가벼이 한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 만 리를 가려는 뜻이 있는 자는 중도에 발을 멈출 수 없고, 천하를 통일시키려 하는 자는 소사를 생각하여 대사를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아직 위와 촉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폐하께서 배를 타고 원정을 가신다면 적들은 빈틈을 노릴 것입니다. 통일 대업이 성취된다면 공손연은 지금 토벌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종할 것입니다. 요동의 백성과 명마를 아까워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유독 강동의 안정된 기업을 버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십니까?

청컨대 군사들을 쉬게 하고 조속히 중원 지역을 평정하도록 하십시오.


다행히도(?) 손권은 이 의견은 수용하여 오의 요동 정벌은 철회되었다.


236년에 손권은 다시 북진을 결심해 육손과 제갈근에게 양양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육손은 자신이 신임하는 한편을 파견해 손권에게 전황을 보고토록 했는데, 그가 도중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공동 사령관이었던 제갈근은 내부 군사 기밀이나 군의 현황 등이 탄로 남을 염려하여 회군하자는 편지를 육손에게 보냈는데, 육손은 답장하지 않았다.


육손은 군사들에게 순무와 콩을 심도록 하고 장수들과 바둑을 두고 활쏘기를 하는 등 태평한 모습을 보이니, 제갈근은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싶어 직접 육손을 찾아왔다.


육손이 말하기를 '적들은 이미 요충지를 점하고 있는데 주상께서 이미 귀환하셨다는 사실을 알면 걱정 없이 우리에게 힘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군의 군심이 불안하니 우리로서는 우선 군사들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한 후 추격전에 당하지 않도록 계책을 짜 두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육손은 제갈근과 상의하여 제갈근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지휘하도록 하고 육손 자신은 군을 이끌고 양양으로 갔다.


위군은 육손을 두려워하여 급하게 성내로 후퇴했다.


더하여 육손은 전체적으로 제갈근의 수군을 측면에 두면서 군대의 규모를 실제보다 크게 보이는 듯 만들어 섣부르게 덤비지 못하도록 위장했다.


양양은 예주 최남단이자 위의 최남단을 구성하는 군 중 하나였고, 그 동쪽에 강하가 있었는데 육손은 사냥을 위장하고 강하의 3개 현을 쳤다.


그런데 그중 석양을 공격할 때는 하필 시장이 열려 한창 시끄러운 상황에서 오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백성들이 황급히 물건을 버리고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성문은 열리지 않았고, 위군은 백성들을 죽이고 성문을 열었다.


이 부분은 진실로 평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배송지는 육손의 용병술을 칭찬하면서도 강하를 기습한 것을 두고 결국 실질적으로 위에 손해를 입힌 것은 없이(전투에서 승리해 포로로 1,000명을 잡고 많은 수급을 얻었으나 정작 전략적 성과는 크지 않았다는 의미) 무고한 백성들을 가혹하게 처리하게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또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육손은 제갈량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 육손의 가문이 삼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손자 대에 망한 것은 이 일의 업보라고 보았다.


육손은 생포된 자들을 죽이지 않고 또 군사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게 했으며 가족을 데리고 투항한 자들의 경우 다방면으로 돌보도록 했다.


처자식을 잃은 경우 옷과 식량을 주며 위로하여 돌려보냈는데 그들 중에 감동하여 되돌아오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육손이 점령한 석양현 등의 주변에 있는 지역의 백성들도 육손에게 항복해 왔는데 육손은 그들도 역시 재물과 비단을 주는 등 아량을 보였다.


하지만 배송지는 이에 대해서도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라며 냉소적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이는 숲을 없애고 둥지를 뒤엎고서 새끼를 살려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소소한 은혜와 인자함이 어찌 커다란 포학을 보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한편 위의 강하태수 녹식이라는 사람은 계속 위-오 국경에서 오 측에 시비를 걸어 문제가 되어 왔는데, 육손은 그가 위의 원로 장수인 문빙*의 아들 문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계략을 꾸몄다.

*유표 휘하에서 형주 북방을 지키다가 유종이 최종적으로 조조에게 항복할 때 위를 섬기게 되었는데 수십 년 간 강하를 강고히 지켰다. 아마도 좀 더 호전적인 녹식과 아버지의 스타일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빙 간 차이가 컸던 모양이다.


육손은 마치 녹식이 문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끝내 오에 투항하기로 한 것처럼 거짓 서신을 만들어 써서 위-오 국경 지대에 뿌렸다.


이를 한 병사가 녹식에게 가져가서 보여주니 녹식은 의심받을까 두려워 직접 처자식을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배송지는 이에 대해서도 또다시 비판을 가하였다.


어차피 변방의 장수가 시비를 거는 것은 국경 지대에서는 흔한 일이고, 녹식이 물러난다 해도 대체할 다음 사람이 또 같은 행동을 할 텐데 그런 작고 간사한 속임수를 꾸민 이유를 모르겠고 호평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237년에 파양에 있던 중랑장 주지가 군을 소집할 것을 요청했는데, 손권이 육손에게 자문을 구했다.


육손은 파양은 민심이 불안정해 소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도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주지는 소집을 강행했고, 많은 이들이 도적이 되어 난을 일으키고 주지를 살해했다.

결국 육손이 가서 예장, 여릉 등을 다시 평정할 수밖에 없었다.


4. 내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무력하게 밀려나다


손권이 재위한 지 십수 년이 되어가면서 간신의 전횡이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일이었는데, 그는 일종의 황제 비서로서 국정의 대소사에 관한 문서를 모두 자신이 통제하고자 했고 무엇보다 장상과 고하를 가리지 않고 제 신료를 강하게 억누르거나 모함해 검찰권을 남용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손권이 육손에 대한 집중적 신임을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여일이 전횡하는 상황을 육손이 통제하지 못할 만큼 사태가 심각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손권은 태자 손등의 간언도 듣지 않았고, 육손은 태상이었던 반준과 더불어 서로 깊이 걱정했다.


결국 보즐이 작심하고 소를 올렸고 손권은 이를 보고 드디어 탄식하며 여일을 주살했다.

여일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는 것은 육손의 정치력 나아가 정치적 입지가 이미 안정적이지 못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여일의 주살은 238년에 있었던 일인데, 이 시기를 전후해 육손은 주로 대위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권의 입장에서는 육손을 단지 실무에서만 높이 기용하는 식으로 남겨두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로부터 6년 뒤인 244년에 육손은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시 6년 뒤(250년)부터 본격화되는 이궁지쟁의 불씨가 던져진 상황이었다.


손등이 239년에 사망한 후 손권이 3남 손화를 태자로 임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4남 노왕 손패를 동등하게 두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문제가 생겼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자제를 보내 이궁의 양립으로부터 무르익은 정쟁에 힘을 보태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전종이 육손에게 이를 보고하니 육손이 말하기를 '자제들에게 재능이 있으면 임용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사적인 청탁으로 임용을 구해서는 아니 된다. 이 점이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면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이궁이 양립할 적에는 결국 당쟁과 대립이 생기게 된다고 들었는데 이는 옛사람들이 매우 기피했던 일이다.'라고 하였다.


전종의 아들 전기는 손패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육손이 손책의 사위였고 전종이 손권의 사위였기에 서로 인척 관계에 있어 육손은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은 김일제(한무제 사후 곽광과 더불어 보정을 맡아본 훈신)를 본받지 않고 아들을 비호하였으니 그대의 집안에 화가 이를 것이오.'라고 하였다.

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육손과 전종의 사이마저도 벌어지게 되었다.


손패파의 공세가 거세져 결국 손화의 태자 지위 자체가 불안하다는 말까지 있게 되니 육손은 소를 올려 대강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 태자는 정통이므로 반석 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신하이므로 (황제의) 총애와 대우에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만 상하가 안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손권은 의견을 듣기만 하고 무시해버렸고 육손의 조카들인 고담, 고승 등이 손화파에 가담했기 때문에 육손은 결국 손패파의 공격을 받아 내쳐진다.


게다가 태자태부 오찬은 육손과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일로 옥사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손권은 궁궐 안의 사자를 자주 파견해 육손을 질책했다.


결국 육손은 화병이 커져 245년 3월 19일에 63세의 나이로 분사(憤死)하고 만다.

정사에서는 '집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고 언급했다.


육손은 생전에 진영의 부서를 만들자는 여론이 일었을 때 그런 일을 하는 경우 재앙이 있게 될 것이라며 경고하는 간언을 올렸다.


또한 육손이 제갈각(이전 편들에서 언급했듯 제갈근의 아들이자 오의 권신으로서 위의 사마사와 맞서 무리한 북벌을 벌인 후 주살되었다)에게 이르기를, '자신보다 고관을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자신보다 하관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을 보면, 기세는 윗사람을 능멸하고 마음은 아랫사람을 멸시하니 이는 덕행의 기초를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제갈각은 정확히 이 문제 때문에 화를 입었다.


육손의 장남 육연은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 육항이 뒤를 이었고, 후에 손휴가 제위에 올랐을 때 육손을 신원하고 추증해 시호를 소후(昭侯)라 하였다.


육항은 무너져 가는 오를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으로서 역할을 했는데, 274년에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오가 멸망하고 삼국통일이 이루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육항은 여섯 아들을 두었으나 팔왕의 난 때 모두 화를 입어서 육손의 가문은 대가 끊기게 된다.

5. 균형 감각을 갖춘 문무 겸비의 인재, 비운(悲運)에 지다

진수는 육손을 대기만성의 인물로 평하였다.


젊었을 때는 크게 이름을 떨치지 않았지만, 꾸준히 군공을 쌓고 결국에는 성공한 케이스라는 점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육손의 모략을 높이 평가한다고도 언급했다.


평범한 찬사 같지만 육손에게 가장 슬픈 것 같은 평은 '손권이 인재를 식별하였기 때문에 대업을 성취한 것을 찬탄한다.'라고 언급한 점이다.


손권은 아버지와 형의 사업을 이어받아 오의 건국까지 성취해내 수성(守成)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지키는 일은 취하는 일보다 어렵고, 또한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손권을 이를 이루어내긴 했지만, 끝까지 밀고 가지는 못했다.


기록상 손권은 상당히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인 면모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물이 장기 재위하는 동안 매너리즘과 변덕이 상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권의 이러한 점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제갈량이나 사마의와 달리 육손이 특히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는데 손권의 존재라는 요인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손권은 사실상 2세대이기 때문에, 1세대인 유비와 조조 사후에 국가의 중책을 맡고 활약한 제갈량과 사마의와 달리 육손은 창업군주가 건재한 상황에서 그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손권은 229년부터 252년까지 황제로만 장장 23년간을 재위했으니,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육손이 뛰어나긴 했어도 제갈량처럼 홀로 대들보로서 국가를 떠받치는 입장도 아니었고, 사마의처럼 정략에 밝아 끝끝내 생존하고 마는 지독한 승자도 아니었다.


그는 유가적 원칙을 가지고 일관되게 행동했다.


가능하면 아랫사람과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상하 질서가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과 예가 그의 신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송지의 육손에 대한 평가는 과하게 박한 면이 크다.


강하를 쳤을 때 위군이 백성들을 죽인 일은 물론 인과적/도의적으로는 총사령관인 육손에게 최종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육손이 이 일을 가지고 제갈량에 비견 당하며 공격당할 정도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또한 육손이 녹식을 쳐낸 일도, 녹식의 다음으로 누가 오든 간에 그것은 그때 보아서 처리할 일이고 현재로서는 녹식이 계속 변방에서 불편한 군사적 충돌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피를 흘리지 않고 그를 처리하는 계략은 필요한 일이었다.


여일의 건이나 이궁의 쟁을 보면, 육손은 정치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손권은 노련한 군주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위나 촉의 재상들과 달리 오의 재상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저우언라이의 총리직이 그랬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실무와 행정에서만 재량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손이 이궁의 쟁에서 취한 입장은 특별히 손화파였다기보다는, 그냥 유가적 원칙론 아니 상식을 말한 것이었다.


육손이 정무적으로 무능했다기보다,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 육손이 맡은 오의 승상이라는 자리는 사실상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변덕스럽고 자신을 온전히 신임하지 않는 황제, 표독스럽게 서로를 노려보는 이궁의 각 파벌, 제갈량 사후 현저하게 약화된 촉과 불안정한 위의 정세..


거기다 자신과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동료가 손권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데 이르면 제정신이기가 도리어 어려웠다.


심한 무력감과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육손이 물러나지 않은 것은 어쨌든 자신이라도 자리를 지켜야 나라가 유지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가는 황제의 냉대와 모욕, 동료의 억울한 죽음, 계속 포학하고 혼탁해지는 정국으로부터의 눈총이었다.


동서분당 때의 율곡 이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당쟁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이이는 구양수의 <붕당론>을 언급하면서 군자의 당이라면 있지 못할 것도 없지만, 동서가 모두 사림에서 기원하니 서로를 소인으로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건전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갈라져 있었고 그에게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론을 말하면 '그래서 어느 쪽이라는 거냐?'는 비이성적인 답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이는 친구나 동료 등이 사실상 서인 측에 있었기 때문에 서서히 그리고 반사적으로 서인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후엔 아예 성혼과 더불어 서인의 종주가 된다.)


추정컨대 육손과 그의 생질들은 (당연히) 원칙론적 태자 지지였는데 태자가 점점 궁지에 몰리니 특히 생질들이 결국 손화파에 가담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손으로서는 훈신ㆍ중진으로서 혼란에 혼란을 가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편으로 손패파에게 공격받고 다른 한편으로 조카들을 비롯한 손화파가 계속 더 큰 지원을 요청해 심란해했을 공산이 크다.


태자를 이미 임명했다면 그것을 흔들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다.

태자가 크게 과를 범한 것도 없는데 흔들려는 것은 그냥 자신들이 권력을 취하고 싶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오는 혼자는 물론이요 촉과 힘을 합쳐도 위를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여기에 정치적 불안 요소를 두는 것은 외환에다 내우를 스스로 만드는 격이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창업군주인 손권 자신이 바로 부형으로부터 이어받아 세운 오를 잿더미로 만들 그 선택을 했다.


육손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듯, 유일한 상식인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며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더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있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이였다.


흔히 위에 사마의, 촉에 제갈량, 오에 육손을 두고 용병술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유가적 원칙을 고수한 외로운 재상'으로서도 육손은 크게 평가받을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높이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로 본다.


https://youtu.be/W3SX6cN0tDA?si=1s8wbNxTcHjQyUID


참고) 정사「삼국지」권58 오서13 육손전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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