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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yden Nov 18. 2018

눈을 감고 귀로 떠나는 라디오 여행

심야 라디오의 미래

 올해 상반기를 장식한 여러 TV 프로그램 중 숲 속의 작은 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TvN에서 방영한 이 프로그램은 총 10부작에 걸쳐 4.7%라는 시청률을 거두었는데, 이는 케이블 채널 치고는 꽤나 준수한 시청률이다(사실 요즘 TvN을 케이블 채널로 칭하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긴 오프 그리드(Off-grid) 하우스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을 꽤나 관심 있게 지켜봤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참신하다고 생각했던 연출은 바로 ASMR이었다.

ASMR을 적극 활용해 성과를 거둔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 / TvN

 ASMR은 자율 감각 쾌감 작용(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이다. 오감을 자극하여 심리적 안정감, 쾌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론인데, 이론과는 관계없이 주로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백색소음에 한정해서 사용된다. 이를테면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파도소리, 속삭이는 소리 따위의 것들이다. 프로그램은 중간중간에 잔잔하게 물 흐르는 소리 등을 가만히 들려주며 시청자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높은 시청률은 이러한 요소에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대중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ASMR을 훨씬 더 잘 써먹을 수 있는 환경이 있다. 바로 심야 라디오 방송이다.


 대부분 사람이 쉬거나 잠을 청하는 심야시간. 이 시간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고정되어 있다. 여전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 음악 스트리밍 앱의 발달로 많은 사람은 더 이상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동안 라디오 방송은 고정 청취자가 빠져나가지 않기만을 바라며 더 많은 사연, 더 깊은 음악을 담으며 다른 라디오 방송과, 또 스마트폰 앱과 경쟁해왔다. 소모적인 경쟁을 하기보다, 차라리 앞서 말한 ASMR을 활용하여 대다수 사람을 더 잘 쉬게 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바로 소리 요소인 ASMR을 극대화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장르다.


 ASMR은 일상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리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공간감'을 줄 수 있다. 청취자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겪었던 경험에 빗대어 실제 소리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으며, 이를 극대화하면 마치 실제로 소리가 나는 장소에 있는 듯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감각을 모두 차단하고 쉬는 심야 시간에 이러한 경향은 도드라진다. 따라서 이러한 강점들을 모두 활용한다면, 대중들이 편안하게 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 귀를 통해 색다른 장소로 안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TV 스크린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 속 여행을 떠나는 라디오 여행 다큐멘터리다.

파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쉽게 바다를 상상할 수 있다 / 네이버 블로그

 라디오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영상은 눈을 감고 상상하는 청취자의 몫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차분한 음성으로 여행 안내자를 맡는 도슨트와 상상을 적절하게 이어 줄 소리 요소뿐이다. 도슨트는 전문적인 정보 대신 최면술사가 상황을 그리듯 여행에 맞는 내용을 그려주며, 청취자의 편안함을 유도할 수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라디오 다큐멘터리에서 기존의 광고 문법은 몰입을 해칠 수 있으므로 배제하며, 대신 새로운 형태의 광고 방식으로 PPL을 도입한다. 도슨트가 상황에 필요한 물품을 드문드문 끼워 넣으며 자연스러운 형태의 광고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청취자는 본인만의 쉼과 여행에 몰입할 수 있으며, 편안함을 원하는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시도가 계속해서 쌓인다면, 방송사의 측면에서도 누적된 소리 요소로 인해 제작비 규모의 경제 역시 가능할 것이다. 창작자에 대한 저작권료를 계속해서 지출해야 하는 노래와는 달리, 방송사가 직접 채취한 소리 요소를 방송에 지속적으로 활용해서 시작하는 시점의 방송보다 제작비를 현저히 줄이는 것이다. 비용 대비 효율 극대화의 측면에서도, 라디오 다큐멘터리는 심야 시간대를 '버리고 가는 시간대'가 아닌 '가장 경쟁력 있는 시간'대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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