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까지의 여정 그리고 뜻밖의 친절
조금 이른 새벽,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져 저절로 눈이 떠졌다. 간밤의 추위로 인해 엄마 뱃속의 태아 마냥 내내 웅크리며 잠을 잤다. 방 안의 라디에이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그럴수록 두 눈은 더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았다. 어제 저녁 체크인을 한 일본인 룸메이트가 곤히 자고 있어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냥 누운 채로 날이 밝길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날씨 정보를 찾아보니 오늘 파리의 날씨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날씨라는 건 곧 비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럽에 있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날씨 탓에 그들이 왜 해가 쨍쨍한 날 모두 공원으로 쏟아져 나오는지, 왜 해가 쨍한 날씨를 보고 그토록 감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좋은 날씨'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씨라면 베르사유 궁전을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근교에 위치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베르사유'. 프랑스에 온다면,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바로 베르사유였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던 곳이기 때문에.
내가 처음 마리 앙투아네트를 알게 된 건,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를 통해서다. 영화 자체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만큼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혹은 사치스러움을 넘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여인의 삶에 그을려 있는 고독과 외로움들이 그녀의 휘향 찬란한 삶과 대조되어 몇 번이고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영화 자체가 '나도 저런 곳에서 살아 봤으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그만큼 영상의 색채미 또한 풍부해서 눈이 즐거워진다. 동양의 미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로코코 시대의 서양 미 또한 볼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커스틴 던스트가 주연으로 나오고, 소피아 코폴라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라는 것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프랑스에 간다면,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곳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곳을 직접 두 발로 디딜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베르사유는 파리 근교로, 4 존에 위치하기 때문에 왕복으로 까르네(프랑스 교통권) 4장이 필요하다. 가는 방법은 RER 또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나는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숙소 근처에서 메트로를 타고 9호선 종점 '퐁 드 세브르(pont de sevres)'역까지 가야 했다.
일찌감치 떠진 눈 덕분에 별다른 지체 없이 준비를 마치고 조식까지 든든히 먹은 후 지하철을 타러 갔다. 물론 자켓 안주머니에 오늘 사용할 교통권 4장을 넣어놓고, 가방은 옷핀을 채워 만반을 준비를 하고 말이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타는 메트로. 정말이지 긴장이 안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파리의 메트로는 좀도둑이 들끓는, 소매치기의 소굴이나 다름없었으니깐.
잔뜩 긴장한 채 탑승한 메트로는 생각보다 별 게 없었다. 이상해 보이는 사람도 없고, 좌석도 꽤 여유롭게 남아 있어 1인용 자리 의자를 펴서 앉았다. 가방에 손을 올려두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그렇게 베르사유로 향했다. 한참을 메트로가 달리고, 이 쯤이면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종점이니깐 오래 걸리겠거니 하며 메트로 안의 사람 구경, 창밖 구경을 하며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아 이거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싶을 때쯤, 어느 역에 메트로가 정차했다. 그리고는 메트로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다 내렸다. '뭐지..? 여기는 내가 내릴 종점이 아닌데.. 이름이 다른데.. 난 좀 더 가야 하는데?' 3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승객들이 전부 내리는 모습에 '종점인가?' 싶어 나도 일단 사람들을 따라서 내렸다. 메트로에서 내린 사람들은 서둘러 출구를 향해 걸어갔고, 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앞에 보이는 두 여성을 급히 불러 세웠다.
"Excuse me!"
한 사람은 뽀글뽀글한 머리에 키가 큰, 전형적인 프랑스인처럼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히잡을 두르고 있었다.
"한국 사람이세요?"
응? 나는 '익스큐즈미'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나보고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것도 한국말로. 게다가 저 사람은 히잡을 두른, 어딜 봐도 동양사람 하고는 다른 생김새였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한국 사람 냄새 알아요!"
'한국 사람 냄새'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중요했다. 히잡을 두른 여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국말을 잘 했다. 내가 먼저 길을 묻기도 전에, 나에게 어디에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아, 정말 그녀는 파리의 구세주였다!! 그 여자분에게 내가 가야 하는 역과 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잠시 지하철 노선을 보고는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반대편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쯤에서 지레 짐작이 가겠지만, 나는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의 정반대 편으로 온 것이다. 이럴 수가. 어째 너무 오래도록 도착을 안 한다 싶었지만 내가 정반대 편으로 향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나는 한 라인의 끝에서 끝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어 실력이 훌륭한 그 여자 분은 따라오라며 직접 반대 방향의 메트로를 타러 가는 길까지 함께 가주었다. 너무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라워서 한국말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저 이런 거(히잡) 하고 있지만, 한국인이에요. 한국에서 10년 살았어요. 마포에서."라는 거다. 정말 놀랄 노 자였다. 그 여자 분은 한국을 매우 그리워하는 거 같았다. 반대편으로 가는 내내 "아.. 그.. 호떡 너무 먹고 싶어요. 오징어볶음!, 김치!..."한국 음식들을 하나 하나 나열하며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잠깐 사이에 우리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반대편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갔더니, 메트로 입구에서 처럼 까르네 티켓을 또 하나 사용해야 했다. 나도 그녀도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내가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의 카드를 띡- 찍어주고는 가라고 했다. 아,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다니. 그것도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말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고마워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 그리고 핸드폰 조심해요! 여기 한국 아니에요!"
라며 끝까지 나를 챙겨주었던 그녀. 나중에야 생각난 거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물은 게 없었다. 이메일 주소라도 적어줄껄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만난다면, 고마움에 대한 표시를 해주고 싶었다. 다음 여행을 떠날때에는 명함을 만들어서 와도 좋을 것 같다. 여행 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도움을 받거나, 친해지게 된 사람들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줌으로써 그 인연을 조금 더 길고 질기게 만들어 줄 수 도 있으니깐 말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고마움을 뒤로 한 채, 친절한 그녀 덕분에 나는 반대편 메트로를 타고 무사히 베르사유로 향할 수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지난주 여행 이야기 업로드를 못했어요. 죄송합니다..흑..
다음주에는 이어서 베르사유 이야기가 연재 될 예정입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