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너마저'의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를 듣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종종 생각을 한다.
어릴 땐 거리가 좁을수록 친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어떻게든 좁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일상을 오밀조밀 나누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얘기들을 비밀인양 털어놓았다. 진짜 나에 대해 알고도 날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그것이 비로소 친함의 증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금 더 자라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좁아진 거리가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까이 보아도 예쁘고 오래 보아도 사랑스러운 건 풀꽃에게나 맞는 말이지, 나는 아니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성질은 마냥 맑고 아름답기만 하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되려 어둡고 못생긴 내면으로 주변의 이들을 짓누르게 될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가가고 멀어지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자의로는 다가가는 것 밖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거리를 두는 방법을 모르겠다. 기어를 R에 놓으면 후진도 착착 할 수 있고 경고등도 있어서 적정 거리를 넘어서면 삐빅 하고 알려주는 신식 차량이라면 좋겠다. 도통 멀어지는 법을 모르는 나는 후진 기어도 없는 차가 아닌가 생각하면 이건 정말로 심각한 폐급이지 싶다!
그래서 나에게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어른의 노래다. 이 노래는 슬프다. 나라는 사람의 무게가 남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래서 물러서 본 사람의 얘기가 주는 상실감을 느낄때면 울적해지고야 만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 좀 줄일 수 없냐고
네 그러면 차라리 나갈게요
그래 알고 있어 한심한 걸
걱정 끼치는 건 나도 참 싫어서
슬픈 노랠 부르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 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너의 목소리에
믿을 수도 없는 꿈을 꿔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브로콜리너마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음악은 때때로 남에게 시끄러운 소음이다. 내가 아무리 엉망진창 노래를 틀어도 기어코 내 손을 잡고 함께 말도 안 되는 춤을 춰줄 거라 기대했던 이들에게 마저 결국엔 시끄러웠을 테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면 그저 자정의 공원을 혼자 달리는 수밖에 없다. 늦은 밤 방 한 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출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시끄럽게 이웃의 잠을 방해하고도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날에도 내일의 출근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는 어른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내가 트는 음악은 어떤 크기가 볼륨의 적정선인지 모르겠고 갈 곳 없는 손을 휘저으며 혼자 추는 춤은 어딘가 어설프다. 멀어진 친구가 꿈에라도 나오는 날이면 나는 내일의 출근이야 어떻게 되든 하는 수 없이 우울함에 뒤척이며 잠을 설치고야 만다.
언제쯤 적정거리를 아는 사람이 될지 모를 일이다. 아무에게도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정작 볼륨을 낮추는 법도 모르고 이 방 문을 열고 나갈 용기도 없는 나는 과연 타인에게 어떤 이웃이려나.
아마도 좋은 이웃 같은 것은 평생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