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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옐옐 Jan 02. 2018

이름을 불러 기억하는 일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고

나는 내 생각을 진짜 많이 한다. 내 기분은 어떤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 우주의 주인공은 나니까 이 세계에선 모든 별도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이다. 조금 자기중심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남들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은 나도 남에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긴 하니 이런 나라도 평균치 이타심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기적이기보단 개인적인 사람이라고 애써 믿는다.


내 우주의 태양인 나. 하지만 이 작고 무의미한 나의 우주를 넘어 진짜 우주에서 보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쩔 땐 내가 이 넓은 우주에서 먼지만도 못 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될 때도 있다. 나 같은 건 너무 작고 아무것도 아니어서 지금 당장 사라져도 이 거대한 세상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일들에 자연스레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치만 시끄럽게 내 세계를 뒤흔드는 폭우와 바람 같은 것들에 정신을 못 차릴 때면 또 한편으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게 다가온다. 나의 바다에 부는 이 거친 파도가 남에겐 술잔 표면의 일렁임도 안 되겠거니 생각하고 나면 먼지 한 톨의 무게를 난 왜 이리도 무겁게 져야 하나 싶다.


이 세상은 아마도 나 같은 수많은 먼지-우주들의 집합체일 테다. 멀리서 보면 먼지 같은,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의 소우주일 사람들. 그러니까 나를 지금 바라보는 저 사람의 눈동자 안에도 우주가 하나쯤 들어 있겠지. 하지만 그 사실을 나는 너무 자주 잊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사람들을 그쳐 스쳐 보낼 뿐이다.


나와 관여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화하다 보면 쉽게 무감해진다.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저 그가 정해진 기한 내에 나에게 정해진 일을 완료해 줄 것이냐만 중요할 뿐.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나의 일을 그르치는 사람에게 말을 돌 던지듯 뱉어놓고 아차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다. 그 순간 그는 이름이 없다. 일을 하며 마주하는 사람이 오십 명은 족히 넘을 텐데 그들의 세상은 어떻게 굴러갈는지 궁금해해 본 적 없다.


피프티피플은 한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50명(정확히는 51명)에 대한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모든 챕터가 사람의 이름이다. 짤막짤막 네다섯 장에 걸쳐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넘어간다. 피프티피플 속에서 작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기억한다.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는 적어도 51명 분의 신을 신고 세상을 살아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던 많은 일들도 그래서 그랬겠거니, 싶어 진다. 한 사람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의 저마다의 부분이 현실에 있을 법하다고 생각되지만, 내가 가장 소설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말미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챕터에서 지금까지 등장했던 인물들이 C열, D열, E열... 쪼르르 채우고 앉아있는 영화관에 불이 난다. 하지만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고 살아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이는 아마도 현실에선 있기 어려운 일이겠지, 생각했다. 어디선가 사고가 나고 누군가가 다치고, 죽고 하는 일이 너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설사 누군가 다치고 죽는다 한들 그 사람을 알기 전엔 그것도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세상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일을 그저 숫자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은 참 슬프다. 이 소설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던 건 작가가 그 영화관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되어보아서 일 테다. 작가는 E열에 앉은 김의진도, F열에 앉은 소현재도 되어 보아서 그 누구도 자리에 두고 나오거나 다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조그마한 은색 글씨로 쓰여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이름을 찬찬히 바라보다 보니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은 누구였더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이 51명의 사람도 모두 기억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힘이 닿는 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름과 이름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알고 싶다. 그래서 누구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게. 모두가 건강히 살아서 나오게.



그저, 중년이 되자 문득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호재가 계속될 리 없다, 인생이 이렇게 행운으로 가득할 리 없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뭔가 불행한 일이 닥칠 것이다 ....

호 선생은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 '이호' 의 이야기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 '오수지'의 이야기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 '이호'가 '소현재' 에게 해준 이야기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 '김혁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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