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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돌리 Jun 11. 2023

[여행기] 시즈오카에 가야 하는 이유 (1)

왜냐하면 5월이기 때문이다.



 쓰고 싶었던 여행기는 가고 싶었던 곳으로 시작하면 담백하고 매끄러울까. 지명의 울림이 좋아 시즈오카를 리스트에 새겨둔 건 꽤 오래전이다. 실은 나 혼자 산다에서 이시언이 다녀온 에피소드를 보고 저곳에 가면 나도 반드시 힐링하고 돌아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디어가 편집한 여정에 끌려 시작된 동경이라는 건 직접 다녀오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리 나쁜 눈속임이 아니었다는 것도 다녀오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그간 다녀온 여행과 쌓여있는 사진은 오래되고 가라앉아서 무언가를 끌어낼 만큼의 유인이 없었는데, 이렇게 흔적을 남기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 건 어찌 됐든 MBC다. 여행의 기쁨이 고작 여행지에만 있지는 않고 다양한 조건이 어우러져 가져온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기록한 시즈오카를 읽고 느껴지는 담백함이 또 다른 형태로 누군가를 그곳에 향하게 한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여행이 또 있을까. 이 여행기의 목적은 분명히 설득에 있다.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당장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싶어 몸이 달싹이면 좋겠다.



 차분한 언덕 静岡이라는 지명은 왜 이렇게 쿨 해 보일까. 어원이 걸어온 역사를 찾아보니 지역 특색보다는 정치적인 풍파를 겪으며 꾸역꾸역 바뀌어온 결과물인 듯 하지만, 나무위키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진짜 이름 같은 곳이다.“라고 생각했다. 공항부터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어서 짐을 찾고 문밖을 걸어 나오면 굽이굽이 놓여있는 낮은 산들이 보인다. 시즈오카가 차분한 언덕이라고 불렸으면 하는 건 어쩌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 차분하길 원하니 남의 나라 소도시 이름에 있는 한자 하나静에 꽂혀 이렇게 반가워하는 걸지도. 뭐 어때. 어쨌거나 필요한 것을 주는 여행지라면 잘 찾아간 거 아닌가. 고정관념과 순간의 그릇된 판단, 성급함으로 저지른 실수, 틀을 깨지 못하는 반복에 허덕인다면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단지 스스로 고요해질 수 있는 공간으로 넘어가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시즈오카는 그러기에 적당히 멀고, 충분히 가깝다. 거리로 봐도, 항공편 가격으로 봐도. 그리고 그곳이 주는 경험으로만 봐도.

 


 뜻밖의 이야깃거리도 생겼다. 6.5도의 지진을 겪었고, 한국에선 축의나 부의를 할 때만 꺼내 쓰는 현금을 짤랑거리며 돌아다녔다. 짱구에서만 봤던 야외 온천도 즐겼다. 지나고 보니 소재가 될 만큼 가치 있었다. 하루 단위의 이야기를 쓰면서 간간히 확장된 경험에 대해 남기려고 한다. 천천히 나의 것을 쌓아가는 것만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즈오카 후지산 공항

  공항에서 시미다역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는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제주항공과의 제휴 서비스로 보인다.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공항에서 시즈오카시로 향하는 공항버스보다 30분 정도 빠르게 공항을 벗어난다. 단 시미다 역에서도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동쪽(하마마쓰시) 혹은 서쪽(시즈오카시)으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 두 도시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어 보통 짧은 일정으로 시즈오카를 다녀오는 여행객들은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의 행선지는 시즈오카시였다. 여러모로 이후 일정과 맞물리기에 좋은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시즈오카 공항 주변의 녹밭

 공항 주변은 모두 녹차밭이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녹차의 절반 이상은 메이드 인 시즈오카이다. 일본스러움의 많은 것들을 시즈오카가 대표한다고 한다. 스시를 먹으면서 마시는 뜨거운 가루녹차, 생선과 밥알 사이의 와사비, 시골의 정취와 료칸, 장조림 같은 검은 오뎅 모두 시즈오카에서 만날 수 있다. 날이 흐려서인지 녹차밭 전경의 절반은 녹색이고, 나머지 절반은 회색이었다. 녹차밭은 보성처럼 산을 올라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산등성이 어디엔가 위치한 시즈오카 공항에서 벗어나는 덕분에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도 녹차밭을 볼 수 있었다.

시미다 역

 시미다역이다. 꼭짓점 하나로 모이는 기찻길 사진을 좋아한다. 찍고 나면 항상 희열을 느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뭔가 정신이 집중되는 기분이랄까.

시즈오카시 시내

 시미다 역과 시즈오카 역 사이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시간을 조금만 더 들이면 조용하고 작은 도시의 도심에 도착한다. 시즈오카역은 쇼핑몰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남북으로 통로가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하든 음식점과 호텔이 즐비하다. 비행기 티켓만 끊고 넘어와 무작정 시즈오카 역에 도착했다면 구글 맵을 켜고 늘이고 줄여가며 근처의 맛집을 찾아도 된다. 호텔은 미리 예약해 두는 게 좋다. 보통은 스케줄에 따라 숙박 예약을 미리 해놓는 편이겠지만, 웬만한 비즈니스호텔도 괜찮아 보이는 방이면 내 것이 아니었다. 특히 금연룸이 있는 평범해 보이는 숙소가 빨리 사라진다. 시즈오카역 남쪽 출구로 나와 처음 마주하는 풍경은 살짝 ‘부산?’하는 느낌을 준다. 왜 그랬나 생각해 보니 건너편으로 바로 건너는 횡당보도가 없는 도로의 형태와 눈앞에 놓인 적당하게 높은 건물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도시 어딘가에 있는 기차역을 막 나섰을 때의 느낌이었다. 아무튼 가보면 안다.

시즈오카시 시내

 큰 바퀴에 앞뒤로 바구니와 안장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고등학생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입고 있는 교복도 딱 맞게 헐렁했다. 헐렁한 만큼 그들의 인생에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잠시, 저들은 높은 확률로 학원에 가거나 자습실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시즈오카현에서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인다는 산골 마을 후지노미야에서도 대로변에 자습실이 있다. 대중교통 어디에서든 동경대 입시 성공반을 홍보하는 대입 학원의 광고가 보인다. 긴 교복 치마나 헐렁한 와이셔츠만큼 넉넉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조금 더 순박해 보였는데, 부차적인 것들에 신경을 덜 쓰는 감성이 때문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뭐 하나라도 뒤처지지 않으려는 긴장감에 진하고 꽉 조여진 일상에 익숙한 우리도 이런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제 막 도착한 남의 나라 작은 도시에 대해 뭘 알겠냐만.

시즈오카시 시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구도다. 사진의 정 가운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서 하늘과 땅의 구조물들이 각각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꽉 차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몰입감을 주는 사진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어질 일정도 고요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시즈오카시 시내

시즈오카시 시내에서 먹고 가야 할 음식들이 몇 가지 있어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시내 관광 일정을 여행 끝자락에 잡아둔 터라 그때까지 기다릴 인내가 부족했던 탓이다. 다행히 식당이 위치한 백화점 1층에 코인 라커가 있어 돌아다니기가 한층 수월했다. 코인 라커에 만 원 정도 써야 하는 건 아직도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500엔짜리 동전이 주는 가벼움에 지나치게 설렜고, 대형 코인라커 2개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동전 2개에 환호하며 얼른 라커의 열쇠와 맞바꾸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나나야라는 녹차 판매점이었다.

시즈오카시 나나야 녹차 아이스크림 판매점

시즈오카에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녹차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다. 나나야에서는 각종 다른 아이스크림을 포함해 7가지의 녹차 아이스크림을 판매한다. 맛있다. 사실 상상 못 할 맛은 아니다. 일본식 말차를 평소에 즐겼다면 물에 타는 녹차의 양이 한 스푼, 두 스푼, 세 스푼으로 늘어나는 농도의 변화를 즐길 수 있다. 4단계와 7단계를 먹어봤는데 맛의 차이는 분명하다. 1단계는 좀 밍밍하다고 느낄 것 같다. 자신의 녹차 선호도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3~5단계 중 하나를 추천한다. 7단계는 확실히 진하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다소 빨리 녹는다. 녹차가 진해 옷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으니 참고할 것. 콘으로 먹는다면 가게 밖으로 들고 나와 가급적 빨리 해치워야 한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최대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옷에 묻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시즈오카시 시내

일본은 도로 위에서 달리는 자동차가 보통 귀엽다. 운전대 방향과 운전 방향도 우리와 반대여서 도로가 많은 상가구역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국에 있는 듯하다. 나는 영국을 딱 한 번 가봤다.

시즈오카시 함박스테이크 사와야카 세노바점

코인라커가 주는 만원의 행복 덕분에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던 대기 시간을 알뜰하게 보내고 사와야카 세노바점에 들어왔다. 워낙 현지에서도 유명한 탓에 대기가 압도적으로 길다. 그래도 QR코드로 연결된 홈페이지에서 대기 순번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앞순번에 같이 비행기를 타고 넘어온 한국인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손님들의 대다수가 점심을 해결하러 온 현지인들인 게 의외였다. 사와야카 세노바점을 평가하는 리뷰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특이한 코멘트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는 것 같아요."였는데, 서빙하는 과정에서부터 예사롭지는 않았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고등학생들이 음식이 나오자마자 식탁 위에 있던 테이블 종이를 턱밑까지 들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저게 뭐 하는 거지 싶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소고기 스테이크를 굽는 것 마냥 많은 기름이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서빙하고 나온 함박 스테이크를 직원이 절반을 갈라 석판에 다시 뒤집어 올려주는데, 맛도, 먹는 방법도, 먹는 표정도 진짜 소고기 스테이크 같다. 대기할만한 맛집이다.

시즈오카시 시내
미시마역

시즈오카 도착 당일의 첫 행선지는 슈젠지였다. 잘 뚫려있는 JR과 신칸센이 정기적으로 운영해서 다급히 움직이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간혹 타야 할 노선의 운행 간격이 다소 길 수 있으니 반드시 타야 할 열차를 보내주지는 말길. 구글맵의 안내에 따르면 시즈오카에서 슈젠지를 가기 위해선 미시마역까지 신칸센을 타고 움직이고, 그다음 미시마역에서 슈젠지역까지 별도의 전철 노선을 타야 한다. 날아다니는 신칸센이 미시마역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미시마역에서부터는 신칸센이 아껴준 시간을 천천히 소모하면 된다. 어차피 30분이 넘게 전철을 타야 하고, 또 슈젠지역에 내려도 안으로 더 데려다주는 버스를 타야 한다. 균형 잡힌 대중교통이구나하고 생각하며 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으니 겁먹지만 않으면 된다. 슈젠지는 그렇게라도 가볼 만한 곳이다.

슈젠지 버스정류장

 슈젠지역에 도착해서 걸어 나오면 프라모델로 만든 것처럼 생긴 작은 건물들과 택시 정류장, 버스 정류장이 있다. 전철에서 내리고 막 걸어 나오면서 맞은편에 있던 학생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알고 보니 옆으로 앞질러 지나가는 친구들을 향한 인사였다. 아무튼 슈젠지에 와줘서 반갑다며 손을 흔들어준 고등학생들을 지나치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20분 정도를 기다려 온천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파스모 카드라는 일본의 교통카드가 없다면 현금을 내고 탑승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연령별 선불 제도가 아니다. 정류장마다 뽑아주는 번호표를 받아 탑승하면 버스 앞유리 위에 각 번호표마다 요금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탑승 구간이 길어질수록 내야 하는 요금도 많아진다. 모르고 가면 냅다 현금부터 들이밀며 왜 줘도 안 받지라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다른 승객들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 있으니 알고 가면 좋다. 슈젠지역에서 슈젠지 마을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정도 걸린다.

슈젠지 입구

흐르는 물줄기와 빨간 펜스가 반겨주는 이곳은 슈젠지다. 사진에는 사분면으로 구름, 다리, 건물, 하늘이 담겨있다. 찰나에 포착한 스펙트럼. 오후 5시가 넘었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아라이 료칸은 저녁 6시까지 체크인을 하지 않으면 석식을 주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꽤나 비싼 숙박료에는 두 끼의 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절반을 날린다는 건 얼마나 아찔한 실수인가. 드르륵 캐리어를 끌며 재촉한 발걸음으로 겨우 시간 내에 들어갔다. 헐레벌떡했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 사진으로 가이세키 정식을 골랐다.

아라이 료칸 가이세키 정식

아라이 료칸에서는 숙박하는 동안 입고 다니는 유카타의 색깔을 고를 수 있다. 유카타 입는 법을 몰라 유튜브까지 검색해 봤는데 오비(허리끈) 매는 법은 여전히 아리송해서 어떻게 잘 고정시키고 밥을 먹으러 나섰다. 사전에 배정된 자리에는 와사비와 함께 애피타이저가 준비되어 있었다. 생으로 갈아먹는 와사비는 맵기도 맵지만 일반 와사비보다 훨씬 풍미 있다. 코스로 나오는 모든 음식에 일부러 와사비를 올려먹어 봤는데 대부분 어울려서 더 놀라웠다. 다 먹으면 치우고 새로 올려주는 코스 요리는 거의 모두 해산물과 채소로 구성되어 있다. 더 먹지도 덜 먹지도 않게 설계된 식사를 마친 시간은 8시가 조금 넘었고, 각종 온천을 즐기기에 아직 밤이 충분했다.

아라이 료칸 가이세키 정식
아라이 료칸 가이세키 정식


슈젠지 밤길

 밥을 먹고 넉넉해진 마음으로 동네를 즐기고 싶어졌다. 입고 있던 유카타 차림 그대로 나섰다. 비록 열려있는 상점 하나 없었지만, 다른 나라 시골까지 와서 유카타를 입고 돌아다니는 이질감을 느끼기엔 적당한 고요함이었다. 걷고 돌아오니 이불이 깔려있는 다다미 방에서도, 천천히 즐긴 온천욕조 안에서도 섬나라 어딘가 깊숙하게 스스로 걸어 들어와 적막함을 찾으려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면서 ‘결국 낯선 곳에서 편안해지는’ 천성을 언제쯤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가능은 할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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