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진전은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의미한다
그들은 지난 보름 동안 무려 4번이나 만났다. 누가 들으면 갓 사귀기 시작한 연인의 이야기인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이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휴전 협상단 이야기이다.
보름 동안 4번이나 만났다는 것은 분명 서로 빨리, 자주 만나 협상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데 4번이나 만날 동안 협상이 진전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하나 합의한 것은 러시아가 포위 공격을 하고 있는 지역들에 민간인 대피를 하자는 것인데, 이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양쪽 모두 마음이 급한 것은 맞다. 그런데 왜 협상에 진전이 없을까? 이는 당연히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을 서로 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가 모두 참여하는 새로운 안보체계를 만들어 우크라이나가 거기 들어가는 한편 땅은 내줄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러시아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안보체계와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사실상 무장해제), 그리고 기존 우크라이나 내 친 러시아 반군들이 있던 지역과 크림 반도까지 내놓아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거진 남한 크기만 한 땅을 러시아에게 내주는 한편 우크라이나가 다신 러시아에 저항할 수 없도록 무장해제를 하라는 뜻과 동일하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쟁점 사안을 자세히 알아보자.
첫 번째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새로운 안보체계에 대한 이견이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이 참여하는 안보체계를 요구하는 반면, 러시아는 '미국'을 빼고 우크라이나가 무장해제를 하고 러시아에게 굴복하길 원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에 의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유럽 지역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미국은 러시아에게 강경한 경고를 하는 한편 유럽 동맹국들을 다독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메르켈 총리가 물러난 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던 독일은 여기에서 한발 빼는 모습을 보이고, 그 와중에 조만간 대선을 앞두고 메르켈 총리에 이어 유럽을 이끄는 맹주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와 미국 사이를 오가며 중재를 시도한다.
이때 마크롱 대통령은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중립국 모델'과 '새로운 유럽 중심의 안보체계'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고 돌아와 더 이상 러시아의 거친 행동은 없을 것이라며 의기양양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 독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간 4자 회담, 이른바 노르망디 회담으로 알려진 자리에서 별 다른 진전이 없자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심하고 군사행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마크롱 대통령을 얼간이의 상징인 영국 체임벌린 수상처럼 만들어버리는 엿을 먹였다.)
여기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첫 번째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푸틴과 마크롱이 합의를 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 및 '유럽 중심' 안보 체계 신설이다. 이는 현재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나토(NATO)' 체계가 아닌 미국이 빠진 모델을 만들자는 뜻에 가깝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립국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무장해제를 하고 미국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서지 않겠다고 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국가들이 도와주기에는 너무 멀고 러시아에서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라는 것이다. 미국과 아무 연관이 없고, 서유럽 국가들은 말만 거창한데, 당장 총을 버리고 러시아와 나란히 서 있으라는 것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일 수밖에 없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위성 국가가 되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미국'과 '러시아'가 함께 참여하는 안보체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에 관한 문제이다. 러시아는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군사작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 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러시아가 왜 '전쟁' 대신 '군사작전'이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러시아 공격 방향은 크게 남/북/동 등 우크라이나 전체 지역으로 보이지만, 사실 주 공격 방향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와 기존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 중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애초부터 러시아가 대규모 점령전으로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1)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하여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시도한다 (2) 우크라이나 동남부 땅을 더 많이 차지한다 라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완전 점령해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몇십만 명의 주둔군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산은 우크라이나의 노른자위 땅인 동남부 지역은 직접 지배하에 두고, 나머지 쓸모없는 땅은 우크라이나가 무장해제(중립국화)한 채로만 있으면 언제든 차지할 수 있으니 내버려 두겠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요구하는 땅은 농산물(밀) 산출이 많고 우크라이나를 내륙국가로 가둬둘 수 있는 영역이면서 흑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지도로만 보면 실감이 안 날 수 있지만 사실상 대한민국(남한)만 한 크기의 땅덩어리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 생산을 과점하고 있는 농산물 수출 강국들이다. 우크라이나의 밀 밭을 러시아가 뺏어올 수 있을 경우 국제 농산물 시장에서 러시아 입김은 더욱 강해지고 농산물 수입이 많은 국가들은 러시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영토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러시아는 완강히 기존에 반군들이 점령하고 있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뿐만 아니라 루한스크 지역 전체와 도네츠크 지역 전체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구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국가들 중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발트 3국)은 러시아와 국경이 닿아있음에도 나토에 가입했지만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이들에 있어서 으르렁 거릴지언정 군사력을 사용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지난 10년간 꾸준히 군사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일으켜왔다. 어쩌면 나토 가입을 저지하는 것은 그저 명분일 뿐, 푸틴의 속내는 우크라이나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현재 전황은 우크라이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간 어조가 더 급해진 것도 우크라이나 측이고, 협상이 가능하다며 한 발씩 먼저 물러나고 있는 것도 우크라이나 측이다. 러시아도 이에 맞춰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으나 그들이 양보한 것은 "현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시도하진 않겠다"라는 것뿐이다.
이는 앞선 글에서도 설명했듯 러시아 입장에서는 당연한 스탠스 일 수밖에 없는데, 이미 러시아가 크림반도와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냥 우크라이나의 중립국 화만을 얻는다면, (그것도 만약에 우크라이나가 요구하는 것처럼 미국이 같이 참여하는 모델일 경우) 러시아는 사실상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전쟁을 치른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태도 또한 교묘하게 한 발씩 물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러시아 입장에서는 양보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조건들 뿐이다.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미국'과 '러시아'가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안보체계란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고,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독립 문제는 해당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보자는 것은 독립을 시키지 않고 시간만 끌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미 러시아가 전쟁으로 해당 지역을 망가뜨려놨는데 해당 지역 사람들이 친 러시아 행보를 하겠는가?)
그래서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태도의 변화 없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받으라고만 강요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그런 러시아의 태도를 보면서 "러시아는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항복하라고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단 간밤에 4차 협상도 별 볼일 없이 끝났으니 이제 러시아는 다시 공격의 고삐를 옥죌 것이다. 러시아에게도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서방측의 제재로 러시아 내 생필품이 끊기기 시작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디폴트가 발생할 수 있는 러시아 채권(국채, 회사채)들이 늘어날 수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고통이 가중될수록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압박은 더해갈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도 이를 알고 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공격 방법은 수도 키이우나 우크라이나 전역이 점령을 당하더라도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고 러시아와 대립하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동귀어진(같이 죽는)하는 전략으로 러시아 국민도 같이 고통받게 하고, 러시아 경제를 피폐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 결과 전 세계 경제가 큰 혼란으로 이르게 될 것이다.
결국 키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쥐고 있다. 그들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결국 항복을 할 것이라면 가급적 빨리 항복하여 러시아의 속국이 되던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여 러시아와 세계 경제도 같이 망하게 만들던가. 전쟁 초기에는 항복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였으나, 최근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서유럽과 미국을 원망하고, 심적으로 지쳐가는 발언 내용들로 봐서는 결국 항복을 할 가능성도 낮진 않아 보인다.
여기서 변수는 다시 돌고 돌아 미국이다. 우크라이나가 결국 러시아에 항복하는 형태의 휴전이 이뤄진다면 미국과 바이든 행정부는 큰 정치적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서방 세계의 보호를 바랐으나, 보호를 해주지도 못했고 결국 러시아에게 굴복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볼품없는 철수에 이어 다시 한번 바이든 행정부의 능력에 대해 미국민들이 실망을 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미국 여론은 바이든 행정부 지지율이 높아지는 한편 러시아에 대해 더 강경 해지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의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3 연임을 앞두고 시진핑 주석의 찬란한 업적(?)을 홍보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중국 경제는 지난해 부동산 위기 이후 곤두박질친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발생 이후 가장 크게 박살 나고 있는 증시가 바로 유럽 증시와 홍콩 증시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외국인 비중이 높고 자금 유출입이 쉬운 홍콩 증시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크게 하락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하는 중국의 태도도 서서히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전쟁 발발 보름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전쟁'이라는 단어를 쓰는 한편, 드디어(?)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이 끼치기 전에 전쟁을 빨리 끝내라고 러시아 측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서유럽 국가들은 당장 받을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러시아에게 당장 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마음이 급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좀 더 장기적으로 러시아를 고사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는다면 높은 유가와 경기 침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 전 세계 증시는 유가와 전쟁 종식 가능 여부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지금은 그야말로 회복으로 가느냐, 침체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