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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론 Apr 02. 2024

모르는 얼굴 앞의 갈림길

불쌍한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힙한 동네'라는 피츠로이에 갔던 날의 일이다.

여느 날과 같이 푸르른 하늘, 남반구의 볕은 머리 위로 쏟아지고 알록달록 꾸며진 가게들은 죄다 한 번씩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로 저마다 매력적이었다. 한 가게에 들러 선물용 잎차를 사면서 점원과 나눴던 대화도 즐거웠다. 이제 스몰톡도 꽤 익숙해졌나?

 분명히 행복한 하루였을 것이다. 문득 우유를 다 마신 게 생각이 나서 마트를 들르지 않았더라면.

입구를 지나는데 뒤에서 선명히 'Asian cunt.'라는 욕설이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돌아보자 나보다 키가 뼘은 백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앞질러 갔다. 나름대로 칭챙총이니 니하오니 하는 말은 많이 당해보아서 이런 류의 인종차별로 당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cunt라고? 인종차별에 여성혐오까지 번에 당할 수가 있구나. 게다가 그의 덩치에 기가 눌려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나 자신이 싫었다.


 우유를 사기는 커녕 어딨는지 찾지도 못하고 그대로 마트를 나와 집에 왔다.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빛이 뇌리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공포가 쉬이 가시지 않던 그 때, 환승 버스 정류장에는 어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둘이 사이좋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앞집에서 할아버지가 불쑥 나와 그 아들에게 빨간 자동차 장난감을 주었다. 어린이는 깜짝 선물에 뛸듯이 기뻐하고 그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마트의 남자와 할아버지가 낯선 이를 두고 선택한 길은 완전히 반대였다.

나를 욕설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그와, 본인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보는 할아버지 사이의 간극. 어느 쪽이 아름다운 삶일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고도 대답할 수 있다. 얼마나 측은한 인생이야. 남자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만난다고 해도 이제는 공포를 느끼진 않을 같다. 그냥 불쌍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불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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