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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론 Apr 22. 2024

'워킹'홀리데이,
물류창고에서의 하루

꽃향기도 과하면 어지러워

 호주에 온 지 한 달, 나는 여전히 백수였다.

워킹홀리데이의 '홀리데이'만을 즐기며 매일매일이 불안하던 그때, 백팩커스에서 만났던 친구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제안을 들었다. 꽃 물류창고에 관심이 있으면 말하라는 거였다. 사람들과 대면하며 일하는 직업을 찾고 싶어 그런 쪽으로는 구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원하는 데 취직할 때까지라도 다니면 월세는 벌 테니까. 게다가 꽃이라니! 일사천리로 다음날 출근하는 일정이 잡혔다.

 해가 진 저녁이었지만 트레인을 타고 옆동네까지 가서 안전화와 형광 조끼를 샀다. 꽃을 다룬다니 그만큼 안전한 일터가 어딨을까 싶지만, 물류 창고에서 일하려면 법적으로 필수라고 했다. 가장 저렴한 것을 골라 결제했다. 임시로 나가는 데지 뭐, 하고 지원했지만 막상 오랜만에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나고 설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터에 도착했다. 인상 좋은 매니저가 내게 컨베이어 벨트에 배정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배정된 곳에 가자 사모아에서 왔다는 레이첼이 무지갯빛 장미를 열 송이씩 벨트에 올려두라고 했다.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장미 가시야 좀 따가웠지만, 지급된 안전 장갑도 꼈고 생화 향기가 정말 좋았으니까. 부케 향이 나는 바디워시로 끝없이 샤워하는 기분. 장미는 열 송이씩, 튤립은 다섯 송이씩, 이름 모를 초록색 가지는 네 줄기씩… 한국에서 사무직만 해봤던 내게 뇌는 쉬고 몸만 일하는 기분은 생소했다. 삶의 체험 현장 같기도 하고, 한국에만 있었으면 절대 해볼 일 없는 걸 해본다는 생각에 재밌기까지 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 슬슬 다리가 아팠다. 싸구려 안전화는 무겁고 딱딱해 발바닥이 욱신거렸고, 부츠 뒤꿈치는 거칠어서 아무래도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새 꽃을 가져다 나르느라 팔도 아프고 옷은 더러워진 지 오래. 좋던 꽃향기도 비리기만 했다. 체험 삶의 현장은 애초에 끝났다. 그들은 연예인이기라도 하지, 나는 그저 피고용인에 물류창고만이 돈벌이가 되는 유일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자 쉬던 뇌가 별안간 힘들었다. 게다가 슈퍼바이저의 인도 악센트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어떤 꽃을 가져오라는 건지 모르겠어매번 바디랭귀지를 동원해야 했다. 지금까지 공부한 영어가 이렇게 쓸모없다니!

 8시간의 근무가 끝나고 두 시간 반이 걸려 집에 돌아왔다. 된장찌개를 잔뜩 끓여서 게걸스럽게 먹고 바로 잤다. 하루는 더 나가려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 배탈이 나서 물류창고는 그 하루가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 되었다. 게다가 온몸은 근육통으로 저리고 신발에 쓸린 상처는 꽤 오래갔다.

 그래도 처음으로 돈을 벌었고, 그래서 나도 호주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뿌듯해서 오랜만에 죄책감 없이 쉬었던 것 같다. 호주에 오면서는 모아둔 돈을 써도 좋으니 날씨 좋은 데서 재밌게만 지내자 싶었지만, 삶에 노동이 없다는 건 꽤 큰 빈자리였나 보다. 일하는 도중에는 힘들었지만 일을 하기 전의 설렘과 하고 나서의 뿌듯함을 생각하니 일자리 구하기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워킹홀리데이니까. 남은 나날들에 워킹과 홀리데이의 균형이 맞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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