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시선이 필요해
멜버른에는 유명한 골목이 하나 있다. 바로 호저 레인(Hosier lane)이라는 곳으로, 힙한 그라피티가 골목 전체에 그려져 있는 관광지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촬영지이기도 해 한국인들은 '미사거리'라고도 부른다. (무려 20년 된 작품인데!) 수차례 그 앞을 지나면서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라피티에 흥미도 없고 서울에 있는 압구정 토끼굴이랑 별 차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런 조금은 냉소적인 마음으로.
며칠 전 함께 투어를 다녀온 J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대로 귀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멜버른에 여행을 온 J 씨와는 근교 투어에서 만나 함께 시티를 돌아다녔다. 그래도 난 여기 사는 사람이니만큼 뭔가 '끝내주는' 걸 보여주고 싶어 고민하던 찰나 J 씨가 먼저 호저 레인 얘기를 꺼냈다. 멜버른의 유명한 장소니까 사진이나 몇 장 찍어주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여기가 '끝내주는' 장소였을 줄이야!
처음에는 그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낙서 벽이던 것이, J 씨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각각의 그림으로 분리되어 살아났다. '하트가 너무 귀여워요! 이 앞에서 사진 찍어 주세요.' 라니! 호저 레인 곳곳에는 색색의, 모양도 다양한 하트가 있었다. 전에는 몰랐던 일이었다. 휘갈긴 듯 개성 있는 글자들과 누군지 모를 인물화, 가지각색의 도형들까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니 모든 게 새롭고 예뻤다.
중간쯤 갔을 때, 운 좋게도 그라피티를 그리고 있는 예술가들을 마주쳤다. 검은 배경 위에 스프레이를 거침없이 뿌리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들의 작업을 보며 왜 호저 레인이 이렇게 유명한 관광지가 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벽이라니, 얼마나 낭만이야.
머쓱하지만 여행자처럼 사진도 찍었다. 이러고 나니 호저레인을 들여다볼 생각도 않은 그간의 시간이 굉장한 손해처럼 느껴졌다. 관심 없는 척 지나가는 바람에 보지 못하고 덮여버린 그라피티가 얼마나 많을까! 이제라도 이곳의 매력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 앞으로 괜히 냉소적인 척, 시니컬한 척은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 또 끝내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앞으로는 모든 것이 궁금하고 새로운 여행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