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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row Oct 15. 2024

마음이 아플 때는 그림을 그립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상상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사춘기의 힘든 마음을 그림 그리며 풀어낼 때 마음속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격렬한 성장통으로 몸과 마음이 잡히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을 지상에 발붙이게 한 것은 그리기였다. 시각적인 자극은 어떤 자극보다도 환상적이고 멋진 신세계처럼 나를 매료시켰다.

내 안에 억눌려 있거나 복잡하게 얽힌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어린 시절 나는 말이 어눌한 아이였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편했다. 자폐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여겨질 만큼 말이다. 언어가 서툴고 거칠어 비언어적인 자극을 주는 아버지와 언어를 잘 다루는 어머니 사이에서 소통의 부재를 느끼며 성장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색, 형태, 선, 패턴 등의 조형요소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나는 패션, 디자인, 인테리어 등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순수 미술보다는 실용학문에 끌렸고 특히 패션에 진심으로 몰두했다. 원단의 색감과 질감이 주는 느낌, 패턴과 실루엣의 아름다움에 빠져있었다. 현실의 교복 또는 일상적인 옷보다 과거의 특정 시대나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하고 우아한 의복을 좋아했다. 책과 잡지, 영화나 tv의 특정 시대 패션에 탐닉했던 것 같다. 나는 청소년기에 그런 성장통을 겪으며 자랐던 것 같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며 우울이 깊어질수록 병적인 덕후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던 것 같다. 일본 문화, 특히 망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등에 빠졌다. 사랑받고 싶었던 순수하고 맑은 아이가 어떻게 우울과 몽상을 거쳐 조울의 세계로 초대되었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불안, 강박, 중독 등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왜 비극적 이게도 정신병의 나라에 오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우울을 경험하기 쉬운 유형의 인간이었다고 느껴진다. 지난 10년 정도의 직장 생활 속에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 스트레스를 견뎌내기에 약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참고 인내하는 엄마의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배운 것 같기도 하다. 주양육자인 엄마가 행동했던 대로 따라 했다고 할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유는 내가 유전적으로, DNA가 그렇게 시키니까, 그냥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어떤 식으로든 탓을 하기보다는 뽑기 운이 좋지 않았다고 여기는 편이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조울 발병의 전과 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정신과에 가야 하며 양극단을 오가는 감정기복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분노와 짜증의 대폭발을 누그려 뜨려야 하며 때때로 계절의 변화와 날씨 빛, 소리 등에 지독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를 지켜보아야 한다. 아침의 고요라든지 자연의 신비, 배움의 즐거움 등 살아있다는 기쁜 감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나 자신이 밥값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을 느끼고 세수하고 씻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일상은 무감각하고 무기력해졌다. 예전의 다정하고 상냥하고 명민했던 나를 놓아주어야 했다. 바이러스가 침투해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컴퓨터처럼 셧다운. 망가져버렸다. 영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모든 사건이 백 퍼센트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심한 조울은 아니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예전의 기분 좋았던 일상의 감정들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정규직은 힘들지만 간헐적으로 재능기부에 가까운 프리랜서 일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했고, 발병 전과 다름없이 독서나 그림 그리기, 글쓰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고흐나 실비아 플라스 등의 예술가들처럼 젊은 시절에 생을 스스로 마감하지 않았고 비교적 늦은 30대의 나이에 병이 발병해 예후가 괜찮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조울이 함께한 후 나의 의식, 무의식, 내면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다. 그 과정에서 40대의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내밀한 감정이나 욕망, 갈등을 발견하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진심 어린 애정을 찾는 과정 중에 있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고,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되뇌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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