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Apr 11. 2024

공동체, 문명, 그리고 민족주의

[책을 읽고]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4)

6장에서 11장까지 이어지는 제2부에서 하라리는 정치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우리 삶의 여러 측면을 다룬다.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선명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한 하라리답게, 각 장의 부제는 그 주제에 대한 한 줄 대답이다.



공동체 -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공동체라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리 동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SNS 서비스는 물론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공동체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IS에 가담하는 외국 청년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사람들이다. 평화롭던 노르웨이를 피바다로 만든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소위 외로운 늑대(lone wolf)였다.


사람들이 공동체에 목말라하게 된 배경에는 기술 발전이 있다. 기술은 인간을 몸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불행히도 친밀한 관계는 제로섬 게임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온라인으로 이란이나 나이지리아의 친구들을 알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과정에서 옆집 이웃을 아는 능력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117쪽)


IS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


문명 -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일부 얼치기 학자들이 문명의 충돌 운운하지만, 문명이란 단어의 정의를 떠올려 보면 이는 참으로 단순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일정 지역 내에 머무르며 그 안의 문화에만 노출되었던 예전 세계에는 과연 지역별로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러나 교통수단을 넘어 통신망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묶인 오늘날, 그런 의미에서 문명이란 것은 하나뿐이다.


중세적 환상을 품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조차 그 기반은 7세기 아라비아보다는 현대 지구촌 문화에 훨씬 가깝다. (120쪽)


개체들 사이의 개성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차이를 문명이라 말하는 것은 침소봉대다. 


또한, 어떤 것이 진짜라거나 순수하다고 주장하며 가짜나 불순한 것들을 말살시키겠다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의 세계를 문명 간의 충돌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순수한 이슬람이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다시 말해, 문명이란 단어는 적을 규정하여 아군의 결속을 다지겠다는 의도로 오용되고 있다.


만약 이란과 북한이 E = MC²가 아니라 E = MC⁴라고 믿는다면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 나라의 핵 프로그램에 추호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135쪽)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웃겼던 문장이라서 꼭 소개하고 싶었다.


각설하고,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 공통적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라 사소한 차이를 두고 다투는 형제들의 충돌이다.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변화가 무엇이든 그것은 이질적인 문명들 간의 충돌보다는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을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136쪽)


(c) Sam Island


민족주의 - 지구 차원의 문제에는 지구 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


나는 민족주의가 대단히 위험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책 말미에서 하라리는 가장 위험한 단어 4개를 이야기하는데, 그중 하나가 "순수"다. 순수한 기독교, 순수한 아리아인, 순수한 정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생각해 보자. 순수라는 단어가 수식하기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민족이다. 그런데, 하라리는 생각이 다르다.


민족주의가 없으면 우리 모두가 자유주의 낙원에서 살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오히려 부족의 혼돈 속에서 살 가능성이 높다. 스웨덴과 독일, 스위스 같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민족주의 감정도 강하다. 민족적 유대감이 부족한 나라의 목록을 보면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 콩고, 그리고 다른 실패한 국가들 대부분이 들어가 있다. (139쪽)


하라리의 지적대로, 민족주의가 시대의 발전을 이끈 것은 맞다. 당장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겠다는 포부는 이루기 어렵지만, 일단 내 식구나 우리 동네 사람들부터 챙기겠다는 계획은 성공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나, 하라리도 말하듯 이제 인류의 문제는 민족 차원에서 풀 수 있는 크기를 완전히 지나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핵전쟁과 기후변화다.


핵전쟁은 비교적 잘 대처하고 있지만, 기후변화는 그렇지 않다. 핵전쟁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누구 책임인지 특정하기 쉬운 반면, 기후변화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 탓을 하기가 쉽다. 여기에 민족주의가 끼어든다.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주의를 민족주의 우파가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좌파 사회주의자가 “기후변화는 중국의 농간”이라고 트윗을 날리는 경우는 드물다. 지구온난화 문제에 민족주의식 해답이란 없다 보니 민족주의 정치인들은 아예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 한다. (148쪽)


따라서 우리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서 하라리는 민족주의가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고, 지금은 그 시기가 지났기에 <지구적 정체성>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 세기에 민족 정체성이 형성된 것은 인류가 지역 부족 범위를 훌쩍 넘어가는 문제와 기회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국가 차원의 협력만이 해결을 기대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이르러 국가들은 과거 부족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 개별 국가는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전을 해결하기에 올바른 틀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153쪽)


믿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주장이다. 이 말이 맞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는 <진화>를 통해 민족주의를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유럽적 시각에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nation-state)가 발생하던 시기, 즉 근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동양사를 보면 민족이란 개념은 적어도 춘추전국 시대에 이미 나타났다. 특정한 조건에 따라 우연히 나타난 역사적 산물을 필연적 역사 흐름이라 보는 시각은 위험할 수 있다.


존 레논은 <Imagine>에서 종교, 국가, 소유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노래했다. 민족주의가 근대에 발명되었다는 유럽적 역사관을 수용한다면,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발명된 종교조차 우리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민족을 극복하겠다고?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곧 등장할 계급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