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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05. 2024

이현걸은 위선자인가

격3 덕질

격3 미리보기가 사라진 지금, 격3 덕후들은 또다시 휴재기가 도래했다고 멘붕 중이다.


휴재기가 되면 결국 무한반복 정주행만이 살 길인데, 나는 평소에도 정주행을 반복한다.

다시 보다 보면, 그동안 놓쳤던 장면들을 발견하며 감탄하고는 한다.

예컨대 최근에는, 지은이가 지태 여친임을 부정하며 날리는 주먹에 최준영이 당황하는 장면을 발견했다.

당황한 최준영(영구)의 눈이 클로즈업된 별도의 장면이 존재한다.


이현걸의 위치


오늘은 격3 주인공급 캐릭의 하나인 이현걸에 대해 알아보자.


이현걸은 격3의 메인 스토리인 굴다리 서사의 중심인물이자,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다.

굴다리 서사의 중심 인물로는 강두, 적두, 오진, 동근혁, 그리고 원래의 주인공인 주지태도 있다.

그러나 이현걸은 이 서사의 중심에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일관적으로 자리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다른 인물과 달리 지속적으로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강두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면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래서 <피의 사회> 후반부의 반전이 더욱 충격적이다.


적두는 두 번 정도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이 모두 제철공단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장면이라서, 오히려 제철공단 쪽을 주인공 진영으로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오진은 딱 한 번, 죽을 때 내면을 드러낸다.

물론 오진 2호기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오진이 앞으로 다시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튼, 이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오진은 굴다리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악행을 저지르는 주인공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면 때문이다.


동근혁 역시 직접적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이 없다.

다만, 말조차 거의 없는 강두에 비해 그는 말하는 장면이 많고, 말과 행동이 대개 직설적이며, 이현걸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많아서 어느 정도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면적 서술이 없기에, 이현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현걸이 굴다리 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사실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는 3인칭 관찰자 시점 소설의 관찰자 역할을 맡고 있다.

주인공이 주지태라고 볼 때 그런 것인데, 그렇다고 현걸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3인칭 관찰자 중 하나인 왓슨을 보자.

<네 개의 서명>에서 그는 분명히 관찰자이고, 주인공은 홈스다.

그러나 메리 모스턴과의 연애 서사에서 그는 주인공이다.


굴다리 에피소드는 주지태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영웅담이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진 집단에 해결사인 외부 영웅이 개입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현걸은 3인칭 관찰자다.


그러나 왓슨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이런 3인칭 관찰자는 내면 묘사가 풍부하며, 그래서 독자는 이 관찰자에 이입하게 된다.

예컨대 <피의 사회>의 반전 이후, 이현걸은 작두에 손이 묶인 채 공황 상태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그의 모습은 이 전개에 대해 독자가 보일 반응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현걸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오진과 전혀 다른 의미지만,

<피의 사회> 전개의 핵심을 주도하는 동근혁은 이현걸과 결정적으로 대립한다.

<영구> 에피소드에서 보듯, 동근혁은 이현걸의 <행동하는 자아>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

그래서 나는 동근혁-이현걸이 한 세트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동근혁, 오진은 이현걸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인물들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은 이현걸에 집중한다.



이현걸의 본질


이현걸을 상징하는 두 개의 단어는 개선과 위선이다.


첫째, 그는 개선을 추구한다.

현재 상황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조수지, 현 상황의 한계 내에서 방법을 찾으려는 적두와 달리,

그는 어떻게든 굴다리 주민들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환경 개선에 의한 의식 개선이다.


일단 그는 제철공단 식구들이 본성을 억누르고 인간적인 삶을 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으로, 그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조수지에게 접근하지만 설득에 실패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찾은 것이 아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격기반에 입학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대단히 성공해서, 차소월 등 소위 굴다리 4인방은 물론 임형철 같은 문제아까지도 학교를 다니게 된다. (임형철은 퇴학당했지만.)


그는 굴다리 주민들이 언젠가는 외부 사회와 통합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이상 망가지지 말자"고 말하기도 하고, "바깥에 나온 김에 바람이나 쐬라"고 밥샵에게 권하기도 한다.

차소월이 장본 물건을 따릉이에 싣고 돌아가는 장면은, 이현걸의 꿈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나름 감동적인 장면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위선이다.

이는 주지태와 이현걸의 대화에서 주로 드러나고,

<피의 사회> 반전 이후 이현걸 본인이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며 확정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위선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오진과의 말싸움 끝에 분해하며 앉아 있는 현걸에게 그의 대부 배민수가 다가와 말한다.


"위선도 선이다."


생각해 보자. 위선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 개념은 복잡하지 않다.

위선이란, 선한 의도가 없는 선이다.

즉,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냥 선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위선자인 이현걸은 공리주의자인 오진과 궤를 같이 한다.)


실제로 이현걸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였던 굴다리를 어느 정도 사람다운 사회로 만들었다.

약에 찌들어 사는 레드헬에 비해, 제철공단이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걸의 공이라는 것을 다들 인정한다.

충격적이게도, 제철공단 핵심 인물들은 작가 공인 사이코패스들이다.


사이코패스를 어떻게든 교화시켜 정상적으로 살게 하는 일을 이뤄낸 사람에게,

너의 의도는 선하지 않으니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현걸은 고전적 소년만화의 모범적 주인공 상이다.

20년, 아니 10년 전만 해도 흔해 빠진 캐릭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만화 메타에서 보기 어려운 인물상이라 더 복합적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션>의 워트니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물이다.

올곧고 선하며 긍정적 마인드를 잃지 않는다.

저들과 다르게, 실패했을 뿐이다.



설정 붕괴인가 복합적 인물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이현걸의 위선이 전혀 나쁘지 않으며, 굴다리라는 상황으로 인해 강제되는 "어긋남" 정도라고 생각한다.

고전 영웅의 유일한 결함, <휘브리스>와 궤를 같이 하는 특성이다.

다시 말해, 전혀 결점이 아니다.


이현걸의 진정한 결점은, 언제나 올곧아야 하는 그의 성격이 가끔씩 이그러진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장면 둘을 살펴보자.


첫 번째 장면은 느닷없이 지태의 뺨을 후려갈기는 현걸이다.

그가 주지태와 말싸움을 하는 장면은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러나 "안 때리는 무술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던 그가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이것이 유일하다.


술김에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걸에게 술은 근혁에게 담배, 소월에게 금연껌과 같은 것이다.

술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그가 술김에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것이 유일한 사례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장면은 그냥 설정 붕괴라고 보는 게 마음 편하다.

말하자면, 극적인 연출을 노리다가 설정이 붕괴된 것이다.


더 심각한 두 번째 장면은, <역광>의 바로 다음 장면이다.

다 죽어가는 마리아를 업고 병원이 어디인지 물어보는 지태에게, 현걸은 말한다.


- 이봐! 내 질문이 먼저야.



제 정신이 아니다.

웬만한 악당이라도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병원을 묻는다면 도와줄 것이다.

굴다리에서 가장 올곧은 인물인 이현걸이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가장 쉬운 선택은, 아직 이현걸이라는 캐릭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실수로 나온 장면이라는 설명이다.

이 장면의 핵심은 "병원이 어디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주지태의 집요함이다.

그가 집요하게 질문을 반복하려면, 상대가 대답을 거부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주인공 점수에 있어 주지태가 이현걸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연, 이 두 장면에서 드러나는 현걸의 일면들을 그저 작가의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이 두 장면이 전혀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현걸이라는 인물에 통합해 보자.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리는, 전형적인 집단적 이기주의자라는 설명이다.

묘하게도 이 두 장면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모두 주지태라는 외부인이다.

이현걸의 지상 과제는 굴다리 주민들을 바깥 세계와 통합시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에 그는 너무 지쳐있다는 설명이다.


이현걸은 단칼에 싫다고 거부하는 주지태에게 굴다리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 갑질을 저지른 적이 있다.

이현걸이 집단적 이기주의자라는 설명을 취하면, 이 장면 역시 쉽게 설명이 된다.


또 하나의 손쉬운 설명은 극단적 사실주의다.

이야기 내에서 캐릭터는 대개 일관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소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의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일관성(integrity)은 대단히 지키기 어려운 덕목(virtue) 중 하나다.

결론적으로, 저 두 장면은 이현걸이란 인물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결국, 나는 <안네의 일기>의 애정하는 문장으로 돌아온다.


- 우리는 모두 모순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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