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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09. 2024

유리, 어린 새

[책을 읽고] 한강, <소년이 온다>

차가운 장판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숙제를 하던 방, 그 부엌머리 방을 그 중학생이 쓰지 않았을까. 내가 건너온 무더운 여름을 정말 그는 건너오지 못했나. (208쪽)


작가 한강이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이유다. 


형님네 살던 집주인이 문간채를 사글셋방으로 내놨는디, 주인집 아들하고 동갑 먹은 애기가 그 방에 살았대요. ㄷ중학교에서만 셋이 죽고 둘이 실종됐는디, 그 집에서만 애들 둘이... (197쪽)


운명의 장난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몇 달 차이로, 운명이 갈렸다. 하나는 역사의 주인공, 다른 하나의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영혼, 유리, 어린 새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130쪽)


진수와 함께 감옥에서 고문을 견디던 대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이 소설의 주제, 일까.


서로를 느끼면서 제대로 의사소통은 하지 못하는 혼들. 친구가 죽자마자 그의 죽음을 알아채는 혼. 그것을, 아직 살아 있는 육체에서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걸 유리, 아니 유리가 깨지는 느낌이라 생각하는 것 아닐까.


작가란 존재는, 그 미묘한 느낌을 더욱 섬세하게, 훨씬 더 덜한 충격에서도 감지해낸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없이 깨어졌다. (199쪽)


1장의 제목은 '어린 새'다. 처음에는 이 제목이 아직 소년인 동호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어린 새의 의미가 드러나는 문장을, 독자는 만난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23쪽)


그 어린 새, 정대의 어린 새가 서술하는 것이 제2장이다. 다른 새들의 존재를 느끼지만, 의사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쩔줄 몰라하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서로에게 지지가 되어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혼들이다.


그 어린 새가, 아직 죽지도 않은 육체에서 깨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글프기만 하다.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 (89쪽)


3장의 주인공, 은숙도 그렇게 말한다.



태극기와 애국가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17쪽)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뒷 문단에서 은숙이 건네준다. 나라가 이들을 죽인 게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이 이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별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영화 <변호인>의 명대사, "국가란 국민입니다"를 기억하지만, 그 두 개의 명사가 동치라는 생각은 아직도 들지 않는다. 하나는 추상 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애매하고 두루뭉술하기는 해도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구상 명사다.


이 질문에 대해, 5장의 주인공인 선주는 같지만 또 다른 대답을 준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173쪽)


결국 같은 얘기다. 우리는 헌법 제1조 2항을 잘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한다. 아니, 머리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영화 <변호인>의 차동영(곽도원 분)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것이다.



인간의 잔학성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134쪽)


정말 궁금했다. 제주와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지. 세상 모든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성 역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저런 사람들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전체 인구의 무려 2%가 사이코패스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소대에 한 명쯤 사이코패스가 있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고 통계가 말한다.


그러니까, 월남 갔다왔다는 그 사이코패스는 그동안 풀지 못했던 피의 욕구를 풀기 위해, 항복해서 걸어오는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고, 그걸 즐겼다는 얘기다. 이런 존재가 우리 사회 어딘가에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이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문득 (억지로, 갑작스럽게) 상기당하고 나면, 반드시 저 세상에 지옥이라는 곳이 있어, 이런 존재들이 영원히 불에 타기를 희망하는, 정말 평소의 나라면 가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 읽는 것이 어렵다, 무겁다, 힘겹다, 라고 말한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고 만다.


***


왜 나는 그동안 한강이란 작가를 몰랐을까. 맨부커 상을 탔다는 말에, 그녀의 소설 한 권을 읽어보고 그냥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녀가 5.18을, 4.3을 소설로 썼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완전히 가려 있었다. 그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저 숫자들의 연쇄가 터부시된다는 증거다. 알려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는 채로 잘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 아주 안전한 사회다.


그렇게 대단히 안전하게 되어버린 사회가 바로 일본이다.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라고 걱정하던 차에 이 소설을 만났다. 한강과 같은 작가가 있는 한, 우리나라가 그렇게 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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