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김혜숙, <인식의 대전환> (2)
골방에 앉아 우주를 살펴본다
칸트의 연구보다 칸트의 삶이 더 유명하다. 중세 수도승을 연상시키는 규칙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골방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만으로 그는 우주의 질서를 관찰할 수 있었다.
칸트의 철학에 관해서라면, 제일 유명한 것은 역시 정언명령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정언명령이 인식론의 고뇌에서 시작한 철학하기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의 3대 이성 비판이 연작물이라는 것을, 적어도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칸트 철학의 대단함은, 인식론에서 시작한 그의 고뇌가 도덕철학을 거쳐 미학과 신학(?)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철학하기의 진수를 보여준 철학자라고 칭하기에 손색이 없다. 예컨대, 내감의 형식이 시간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시간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에 대한 엄청난 통찰을 보여준다.
칸트의 위대함은 그가 문제를 해결해서라기보다 비로소 문제를 정확히 보도록 하고 체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13쪽)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감각할 수 없는 물자체,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을 구분하는 것에서 칸트의 인식론은 시작한다. 물자체는 아니어도 현상이나마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험적 인식체계다.
감성은 단지 감각의 입력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원형 데이터(raw data)다. 이것이 프로그램의 내적 구조, 즉 오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인간의 인식 체계라는 것이 칸트의 설명이다. 프로그램의 내적 구조라는 거창한 이름은 개념, 개념화, 범주화 등으로 바꿔불러도 좋을 것이다. 감각 데이터를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뭉뚱그려진 데이터를 서로 다른 요소로 '구별'하는 능력인 것이다.
철학보다 철학하기
저자인 김혜숙 교수도 지적하고 있지만, 칸트의 '범주' 그 자체를 암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 어떤 개인도 역사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한 개인의 지적 성취는 인류 전체의 지적 성취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칸트의 철학하기는 위대했으나, 당시의 과학 수준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스타가 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다. 라브와지에는 화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니, 화학이라는 학문을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천재 과학자였지만,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며 민중을 착취했다는 죄목으로 혁명 정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그 유명한 플로지스톤을 반증한 것이 라브와지에였으니, 칸트가 살았을 당시의 과학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흄과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는 인과와 같은 개념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의 선후에 대한 습관적 경험을 통해 얻게 된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자연이 통일적 방식으로 진행되리라는 보장을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경험이 들쭉날쭉하게 되면 인과의 필연성과 보편성을 확증할 방법이 없게 된다. (105쪽)
인식론의 고뇌를 현대에도 이어가는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나, 같은 문제를 의학, 물리학 차원에서 고민하는 안토니오 다마지오, 로저 펜로즈 등 이 시대 최고 지성들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지금 인류가 가진 최선의 인식론은 흄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위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은 순수오성의 한계를 지적할 때 칸트가 사용한 문장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칸트의 철학하기가 위대하다는 사실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칸트의 철두철미함을 이 시대 최고의 과학적 발견에 접목하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오성의 원칙을 네 가지로 대별하고 그중 두 개를 수학적 원칙, 나머지 두 개를 역학적 원칙이라 칭했다. 여기에서 4*3=12개의 멋진 범주가 발생하지만, 이들 범주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칸트의 '철학하기'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상상력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순수오성의 원칙 네 가지를 통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순수오성의 한계,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인간의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연쇄를 궁극의 끝까지 몰고 가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물자체와 완벽하게 유리된 우리의 마음은 현실과 상관 없는 세계에서 궁극의 진리를 찾으려 한다. 진리는 외부 세계에 관한 것이므로, 이 노력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순수이성의 한계다. 그러나, 바로 이 한계 때문에 실천이성의 자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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