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멋진 어른

채현국 선생이 특별한 삶을 내려놓은 까닭

풍운아 채현국 “시시하게 살아라”

by 김주완

“시시한 삶이 행복한 삶이다.”

“특별하거나 조금이라도 별나려하면 행복은 쭈그러지고 괴로움이 시작된다.”


생전 채현국(1935~2021) 선생이 늘 하던 말이다. 실제 그는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특별한 삶’을 스스로 포기했다.


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채현국은 이듬해 중앙방송(현 KBS)에 연출직(현 PD)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방송이 군사정권의 선전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2014년 김주완과 인터뷰할 당시의 풍운아 채현국


그 후 아버지 채기엽(1907~1988)이 강원도 삼척군 도계에서 운영하고 있던 부도 직전의 탄광 사업에 합류, 간신히 부도를 막아내고 굴지의 광산업자가 되었다. 모기업인 흥국탄광 외에도 충남 천안의 흥국금광, 충남 장항의 흥국흥산(조선), 흥국해운, 흥국화학을 비롯, 무역, 목축, 묘목 사업에 이르기까지 24개 기업을 거느린 흥국재단 그룹을 총괄 경영하며 10여년 만에 큰돈을 벌었다.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1966년에는 마산대학(현 경남대학교)을 인수해 운영하다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업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표면에는 일절 나서지 않으면서 군사정권의 지명수배를 받거나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그 탄광에 받아서 그들에게 호신처를 제공하고, 또 음으로 양으로 반독재의 노선을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문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준”(리영희·언론인) 사람이 채현국이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뒷돈을 댔던 이도 바로 그였다.


그를 수식하는 말도 다양하다. ‘거리의 철학자’(남재희·언론인),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구중서·문학평론가),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임재경·언론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조문호·사진작가), ‘현대판 임꺽정’(이규섭·시인) 등.


그러나 1972년 12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여 종신독재의 기반을 구축하면서 그의 사업도 독재정권과 협력·결탁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됐다. 물론 정권과 결탁하기만 했다면 지금의 삼성을 능가하는 재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973년 그는 모든 사업을 접기로 하고 전 재산을 처분해 종업원들에게 나눠주고 기업은 해체시켜버렸다. 경남 양산의 효암학원만 아버지 몫으로 남겼다. 효암학원은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이다. 그의 아버지 효암(曉巖) 채기엽 선생의 호를 딴 이름이다. 198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사장을 맡은 그는 학교 안 숙직실로 쓰던 조그만 골방에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21년 이후에는 이사장직을 물려받은 아들 채윤하도 그 방에 산다.


채현국 이사장이 살던 방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추한 노인들을 저격하는 말 같지만, 실은 젊은이들에게 경고하는 말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너희도 저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을 밟고 서는 ‘장의사적인 삶’이 아니라 남과 함께하는 ‘산파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돈·권력·명예 중독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시시한 삶을 늘 강조했던 채현국이었다.


“완전한 중독이지. 권력과 명예와 돈은 확실히 중독이야. 도박 따위의 중독은 저리가라입니다. 아편 따위의 중독도 저리가랍니다. 식구가 다 죽든, 민족이 다 죽든 권력은 놓고 싶지 않고, 인류가 다 죽어도 제 혼자서라도 부자 되려는 게 인간입니다. 이 중독이라는 것은 끝도 없고 한도 없고 정말 정체가 없습니다. 완전히 정신병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철학을 담은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제목의 말보다 더 많이 나오는 말이 ‘평범해질 용기’다.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서는 자유도, 행복도 없다는 뜻이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말이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인생, 다른 사람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거들면서 사는 인생, 너무 부자연스러운 삶 아닌가?”(181쪽)

채현국 이사장과 김주완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지 않나? (…) 만약 자네가 ‘평범해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거야.”(297쪽)


채현국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잘 하려는 마음이 자꾸 들지 않습니까? 공부 잘 할란다, 아버지한테 잘 할란다, 엄마한테 잘 할란다.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지. 그냥 하면 되는 건데, 잘 하려고 그러면 꼭 거꾸로 됩니다. 낙담하게 되고 부끄러워지고 창피해집니다.”


김장하 선생도 그랬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며 인정욕구를 버렸고, '평범한 사람들'을 강조하셨다는 점에서 채현국과 김장하는 닮았다.


선생은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하대(下待)하지 않았다. 28년이나 어린 나에게도 꼬박꼬박 존대했고, 처음엔 ‘선생님’으로 칭하다 조금 친해지자 ‘형’이라 불렀다. 이유를 물었더니 “인류의 나이로 치면 젊은이 나이가 노인보다 많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모든 사람을 존중했지만, 남을 밟고 서려는 이를 보면 가차 없이 호된 독설을 날렸다. 비상계엄 이후 드러난 이 나라 지배 엘리트들의 추한 민낯을 볼 때마다 채현국 선생이 떠오른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양산 효암고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다. ‘쓴맛이 사는 맛.’


쓴맛이 사는 맛

*경남개발공사 소식지 <늘채움+> 74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테니스와 ‘훌라’를 즐겼던 김장하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