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시간, 놀아달라던 딸, 휴식이 간절했던 나, 시끄럽던 윗집...
배경이미지: 2024년 1월 1일, 집 근처 해변가에서 썰매 타는 아이들, 썰매 타기 좋은 언덕으로 향하다가, 추워서 집 근처에서 잠깐 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개학하고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마흔을 넘기니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던데... 이번 겨울방학은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것 같았다. 지난 월요일은 마침내 긴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한숨 돌리며 방학을 돌이켜봤다. 족히 3주는 되었다 싶었는데, 달력을 확인해 보니 겨우 2주 하고 주말이었다. 긴긴 방학이 드디어 끝났다 생각했는데, 왤까? 그도 나처럼 겨울방학이 길게 느껴졌다고 하는 걸 보면 우리가 방학 때 꽤 지쳤었나 보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바쁘다. 가족들 삼시세끼 챙기는 일은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나만 먹고 치우면 이삼십 분이면 족히 될 일이지만, 네 식구 식사준비하고 함께 식사하고 치우면 한 시간으로는 감당이 안된다. 난 대체로 두 끼만 먹는데도, 이걸 하루 세 번 해야 한다. 장도 더 많이 봐야 하니 슈퍼에 가는 빈도가 많아지거나 슈퍼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네 식구가 다 집에 있다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일도 있다. 빨래, 청소, 쓰레기 버리기는 큰 변화가 없다.
집안일과 잠자는 시간을 빼면 내게 남겨진 시간은 하루 8시간이 채 안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컸다고 스스로 시간을 잘 보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시시때때로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보챘다. 아이들 둘이 투닥투닥거리며 잘 노는 듯했지만, 딸에겐 오빠만으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집안일을 해치우고 나서 한숨 돌리려고 의자에 앉으면 딸은 어김없이 내게 찾아왔다. 마치 내가 집안일에서 해방되길 기다렸던 것처럼. 함께 놀자고, 간식 챙겨달라고, 이 동영상이 재미있다고 등등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안 되는 내 시간에 나를 챙기며 보내고 싶어 함께 놀자는 딸이 부담스러웠다.
난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놀아달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심심하다고 투정 부린 적은 있지만, 놀아달라고 떼쓴 적은 딱히 없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어서 부모님한테까지 떼쓸 필요가 없었다. 그 시절, 밖에 나가면 놀고 있는 동네아이들무리가 있었고, 그 무리엔 누구나 낄 수도 빠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놀아달라는 요구를 부모님이 받아주지 않을 거라 짐작하고 말조차 꺼내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과 놀이는 왠지 양립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 여겼다. 어린 내게 어른은 재미없고 근엄한 사람이었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잔소리쟁이였다.
내 아이들은 부모인 우리와 함께 놀고, 심지어 부모의 친구들과도 함께 놀 수 있다고 여긴다. 어른과 아이가 아닌 인간은 누구나 함께 놀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 같아 뿌듯하다. 아이들과 내가 친하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사춘기엔 부모와 거리 두기를 하겠지만, 그래도 나와 나의 부모세대와의 거리보단 좁지 않을까? 내 어린 시절과 비교해서 아쉬운 점은 아무 때나 또래와 함께 놀 수 없는 환경이다. 학교가 끝나면 방학이면 누구나 밖에서 뛰어놀던 시절은 이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이 된 것 같다.
나와 다른 유년기를 보내는 딸, 그래서 더 나에게 놀자고 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좀 많이 낯설다. 영하 15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기온 탓에 주로 집에서 머물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기온이 영하 10도보다 높았다면, 아이들과 함께 하루 한 번씩 외출하려 애썼을 텐데... 추운 와중에도 장 보러 함께 가거나, 가끔 썰매를 타러 외출하기도 했는데, 추워서 계획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여러모로 이번 방학은 외출이 많이 부족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한동안은 스스로 시간을 보내는 편인데, 하루 일과에 외출이 빠지니 나와 보내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서 더 놀아달라고 한 걸까?
딸은 방에 이것저것 늘어놓고 쇼핑센터라며 때론 유치원이라며 인형놀이를 하자고 했다. 몸으로 단어를 표현해 맞히는 퀴즈놀이도 했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사서 나머지 가족을 상대로 파는 상점도 운영했다. 딸에겐 한없이 친절한 그가 딸의 사탕가게에 사탕을 후원해 줬다. 잠시 쉬려고 할 때나 글 쓸 때 놀자고 찾아오는 딸을 나는 여러 번 거절했다. 엄마 말고 아빠와 놀라고 거절하기도 했는데, 이미 아빠와 놀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 그가 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 머 하냐고 물어봤는데, 인형놀이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와 참 신기했던 적도 있다.
나 좀 내버려 두란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칠 때가 종종 있었는데, 다행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잘 삼켰다. 딸이 속상한 모습으로 돌아서면 안쓰러웠다. 가끔 겁이 나기도 했다. 아이가 자라 내가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을 때 나의 거절을 떠올리며 나를 밀어내면 어떡하지? 나도 저 나이 땐 엄마를 많이 찾았는데, 이런저런 일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많이 닫았는데... 내 딸도 내게 그러면 슬플 것 같았다. 결국, 그냥 돌려보냈던 딸을 다시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를 향해 웃는 얼굴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저축해서 훗날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도록... 나중에 딸이 나와 함께 하길 거부할 때 나와 함께 한 시간을 갚으라고 우겨볼까?
나 좀 내버려 둬!
이번 방학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려서, 내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내 시간에 욕심을 부려서 내가 많이 지쳤나 보다. 지쳐서 하루가 바쁘게 손에 잡히는 일없이 후루룩 가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론 시간이 더디게 갔다고 느꼈나 보다. 게다가 12월부터 핀란드에서 생전 느끼지 못한 층간소음을 선사하고 있는 윗집의 아이들도 방학이라고 더 신나게 소음공해를 생산해 냈다. 그들 때문에 방학이 빨리 지나기만을 학수고대한 탓도 있으리라. 엄한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딸에게 좀 더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
어쨌든 개학을 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행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지만, 그래도 삶은 흘러가니까 내 가족과 행복에 집중해야지. 느리게 흐르는 것 같던 시간도 다시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개학하고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 일주일은 쉰다는 핑계로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게으름을 피웠지만, 이제 2024년에 하고 싶다고 한 다짐들을 챙겨야겠다. 거창한 목표는 없지만, 내 삶을 조금씩 바꿔나가도록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