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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작가의 글을 읽고

by 나비고

제목 하나는 잘 지은 순정 만화 같은 소설을 읽었다.

풋풋한 고등학생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부한 소재를 다뤘고, 재미와 감동이 크지는 않다.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로 전개되었고, 충격이 별로 없다.

순수한 사랑과 그 나이에만 있을법한 사랑 이야기가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래도 끝까지 읽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청춘드라마 한 편 봤다고 생각하면 된다.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첫사랑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을 위해서 노력한다.

그 흔한 뽀뽀 한 번이 없다.

정말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어릴 적에 하는 짝사랑 이야기, 친구와의 우정, 성장드라마는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다.

영화 ‘내 머릿속에 지우개’를 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책이 왜 인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감성들은 참 아기자기하면서 조금은 허탈한 면이 있다.

재미는 우리나라 소설이 더 월등하다고 생각한다.

양귀자의 ‘모순’이 훨씬 재밌고 읽을 만하다.

신인 작가라 그런지 아직 노련하지 않았다.

다시 읽을 필요를 못 느낀다.

눈물을 쏟아보고자 했던 마음에서 읽어봤지만, 울음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 더 절절하고 조금 더 슬프게 써야 했다.

청춘 소설이라 더 그러했을 것이다.

초등여학생이 읽으면 안성맞춤인 책이다.




고등학생들의 서툰 사랑 이야기이지만 헌신적인 사랑은 그나마 인정할 부분이다.

어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친구 히노 마오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가미야 도루의 사랑이 애잔하기는 하다.

항상 곁에 있는 마오리의 친구 와타야의 우정도 멋있다.

그리고 도루의 누나 사나에는 소설가로 나온다.

필명은 니시카와 케이코이다.

일단 계약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사귀기 위한 조건은 이렇다.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짧게 할 것.

마지막으로 셋째,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도무지 이런 연애를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주인공 남녀는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좋아지고 만다.

히노가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을 도루는 알게 된다.

그것을 눈치채지만, 히노한테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좋아지면 안 되는데 좋아지게 된다.

슬픈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매일매일 예쁘게 시작한다.

좋았던 기억들도 자고 나면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랑을 키워나간다.

도루는 갑자기 죽게 된다.

그리고 히노는 다시 기억을 찾게 된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사랑했던 도루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동안 써왔던 일기장과 그림과 동영상 등을 보지만 어디에도 도루의 부분이 빠져있다.

빠진 이유는 도루가 죽고 도루가 죽기 전에 히노의 절친인 와타야에게 부탁해서 도루 누나의 도움으로 삭제했다.

히노는 기억을 되살려서 그림을 그리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도루가 없었다면 히노의 기억을 되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 친구를 위해서 그림을 권유한 것이 바로 도루이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일 것이다.

상큼하고 풋풋하게 데이트하지만 자고 나면 뭘 했는지 잃어버린다.

있었던 일을 일기에 꼬박꼬박 쓴다.

벚꽃 아래에서 소풍도 하고 자전거도 탄다.

패밀리레스토랑도 가고 수족관도 간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도 하면서 데이트를 즐긴다.

규칙 위반은 좋아한 것이다.

처음은 그냥 서로 모르는 애였지만 점점 사랑이 싹트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연히 찾아온다.

사랑은 매일 봐야 사랑이 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사랑은 금세 거품처럼 없어지고 만다.

아무리 절절한 사랑도 보지 않으면 지독한 사랑은 없어지고 만다.

나도 사랑을 했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정말 사랑했다.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은 다르다.

그러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볼 수가 없고 다시 시작하기가 어렵다.

사랑은 이렇게 끝이나 버렸지만, 기억 속에는 존재한다.

사랑할 당시는 내 머릿속에 항상 그 사람뿐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사랑 이야기는 정말로 무수히 많아도 너무나 많다.

누구나 한 번쯤 불꽃같은 사랑 이야기 없는 사람이 없다.

이 많은 사랑 이야기 중에 하나하나가 소설이 될 자격이 있다.

노래도 사랑을 노래한 노래가 제일 많을 것이다.

사랑이 그래서 인간에게는 가장 최고의 감정인 것이다.

왜 한 번이라도 키스하는 장면을 넣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사랑의 시작은 키스 아닌가.

아무튼 고등학생의 사랑 이야기로 최대한 순수하게 쓰려고 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도루의 가족은 아버지와 누나가 같이 산다.

어머니는 죽었다.

누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출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작가를 꿈꾼다.

결국에는 누나는 아쿠타가와상을 받고 다시 집에 들어와 재회한다.

아버지는 그토록 작가로서 문학상을 받고 싶었지만 응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루의 누나는 꿈을 찾아서 아버지와 남동생을 놔두고 혼자서 집을 나와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나마 이 책에서 더 진부하지 않은 것은 삼각관계를 다루지 않아서 좋았다.

혹시라도 히노의 친구인 이즈미도 도루를 같이 좋아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 더욱더 친구의 우정과 사랑이 반짝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파스텔 같은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싱그러운 초록이 어울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일본의 정취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자전거도 빼놓을 수 없는 데이트 장면이다.

자전거를 수리하고 타는가 하면 주인 없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도시락을 손수 싸 와서 소풍하는 장면도 인상에 남는다.

아름답게 그리려고 작정하고 쓴 작품이다.

너무 지고지순해서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갑자기 도루가 뜬금없이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는다.

그렇게 허망하게 주인공을 죽여서 굉장히 허탈했다.

남겨진 히노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기억상실증도 이제 완쾌가 되었는데 막상 병이 나으니까 좋아했던 남자 친구는 이 세상에 없다.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사랑을 갈라놓았다.

그러나 기억 저편에 히노의 가슴속에는 순수하고 다정한 남자 친구 도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토록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헌신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무조건적인 헌신을 한다.

사랑이 원래 그렇다.

눈이 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고 눈물이다.

영원한 사랑은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사자의 기억 속에는 분명 그 사랑은 존재한다.

가슴속에 있고 온몸에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기억이 상실되어도 사랑만큼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사랑은 다시 오게 마련이다.




이 책 또한 속편이 나와도 좋겠다.

예를 들어 히노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데 죽었던 도루의 쌍둥이가 나타나서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는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학창 시절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지만 서툴러서 사랑이 더욱 아름답다.

보통은 대부분 짝사랑을 많이 한다.

요즘 친구들은 어떤 사랑을 하는지도 꽤 궁금하다.

보통 사랑을 알아가는 시기는 대충 중학교 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성을 알아가고 멋을 내기 시작한다.

사귀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나는 숙맥이라 거의 학창 시절에는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그냥 속으로 좋아하고 표현하지 못했다.

사랑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주인공 히노한테 도루는 이미 고백했다.

기억상실증이 있는 것도 알면서도 눈치채지 못하게 배려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누나의 문학상 발표날 셋이 히노의 집에 몰래 가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남자의 집은 이미 갔다 왔다.

히노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와타야는 히노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면서 시간을 끈다.

그리고 도루는 히노의 방으로 무사히 들어간다.

그리고 먹을 것도 챙겨서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나올 때도 아무 일 없이 빠져나간다.

그런 경험 한두 번쯤 해봤을 것이다.

어릴 때는 의기투합도 잘되고 그랬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히노의 일기장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서 꼼꼼히도 적었다.

날짜가 적혀있고, 아침과 점심의 특이 사항과 남자 친구와 무엇을 했는지 기록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 무엇을 했는지 정말 모른다.

그래서 도루가 절차기억을 말하며 그림을 그릴 것을 권유한다.

몸이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몸으로 체득한 자전거 타기 같은 것을 절차기억이라고 한다.

뇌는 알지 못하는 신체가 저절로 알아서 하는 기억들이 꽤 있다고 생각한다.

후각도 마찬가지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기억을 더듬게 한다.

남자 친구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여자주인공의 기억이 되돌아온 것은 희극이다.

이야기의 구성상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별로 없다.

차기작은 앞에서 말했듯이 기억이 되돌아온 히노와 쌍둥이 도루의 애정행각으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치밀한 유사 연애의 조건은 기억상실증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수첩과 일기를 읽어 나에 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학교가 끝날 때까지 말 걸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연락이 빈번히 와도 시간 관계상 답신을 할 수 없는 데다, 메시지로 전날의 나와 관련된 화제를 꺼내며 곤란해서 연락은 짧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태가 이래서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니까 연애 감정은 갖지 말라는 이유에서였으나 말처럼 규칙은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늘 붙어 다니니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물론 히노의 외모도 예쁘니까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루는 고백하지만 일기에다가 그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다.

도루의 배려와 긍정의 힘이 히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고 기어코 기억상실증에서 해방이 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서로를 향하고 있었으나 도루의 죽음은 정말로 아쉽다.

죽지 않고 계속 사랑을 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히노는 병에서 서서히 완쾌된다.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면 사랑이 찾아온다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해보지 못해서 어릴 적에는 사랑을 깊게 해보지 못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숨길 수가 없다.

소나기 같은 사랑이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다.

지금 내리면 피해야 한다.

봄이 오면 벚꽃이 만발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소풍을 가고 싶다.

꿈같은 사랑은 몇 번을 해도 지겹지 않을 것이다.

기억에 잊힌 사랑이 다시 소환될 수는 없다.

이미 기억으로 남았다는 것은 사랑은 이미 끝난 것이다.

현재 사랑하고 있다면 눈과 귀가 먹는다.

사랑은 뇌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사랑하는 사람만 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 듣게 된다.

그리고 질투도 하게 된다.

소유하려 하고 통제하려 한다.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사랑이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양각색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좋고 읽어도 좋다.

진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것이 사랑 이야기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도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도 모두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다.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내가 왜 울지? 아직 아픈 걸까. 그렇지만 따스하기도 하거든. 난 아마 아직도 그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아. 하지만 괜찮아. 언젠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행복에 손을 뻗을 거야.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조금 더... (중략) 마오리가 그린 도루는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다정한 얼굴로 마오리를 지켜보던 그날 그대로 지금도 거기서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표정이 다 웃고 있다.

문자를 확인하는 눈은 정말로 초롱초롱하다.

좋은 것만 해주고 싶고 먹이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멋있게 보이고 싶고 옷에 향수를 뿌린다.

돈도 아깝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고 모든 것이 다 좋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다.

술 먹고 토해도 좋고 방귀를 뀌어도 좋다.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고 헤어지기 싫다.

사랑하면 망설이지 말고, 고백하기를 바란다.

오늘 밤 당장 사랑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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