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짱문 Feb 01. 2019

인위적인 눈만큼이나 인위적인 영화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리뷰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그토록 소원하던 ‘총몽’의 영화화 판권을 구입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타이타닉], [트루 라이즈] 등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유명 감독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터미네이터], [아바타], [다크엔젤(TV 시리즈)] 같은 작품들에서 첨단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 속에서 인간과 기계, 인간과 외계인 혹은 인간과 유전자 조작 인간, 무엇이 더욱 인간다운가 혹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일련의 작품 기조를 보이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춘 감독이기도 하다.

[총몽] 역시 제임스 카메론의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으로, 감독은 항상 [총몽]의 영화화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총몽은 90-95년 작품으로 [터미네이터]이 84년, [터미네이터2]가 91년에 나왔으니 [터미네이터]가 총몽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가 2000년에 기획한 tv 시리즈 [다크엔젤]의 경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제임스 카메론이 기획한 드라마 시리즈 [다크엔젤]


나 역시 그의 영화화 계획을 기사를 통해 읽고 난 후, [총몽]이라는 작품이 궁금해져 그제야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 [알리타]는 원작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절하게 한 편의 영화로 각색했다. 알리타(로사 살라자르)를 자렘에서 버려지는 쓰레기장에서 주워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박사 이도(크리스토프 왈츠), 그런 박사를 연쇄 살인마로 오해해 그를 쫓는 알리타의 모습,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자렘에 가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휴고, 격투 구기 스포츠인 모터볼 대회, 거대한 흑막인 노바까지, 영화는 원작 만화를 좋아하던 팬들이 크게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게끔 적절한 각색을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자본을 투자해 그럴싸한 옷을 입은 이 영화가 수많은 실패작을 남기는 일본의 실사화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무엇인가는 의문이다. 

원작 만화 [총몽]


앞서 이야기했듯이, 9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종류의 미래사회 속 기계화된 문명과 인류의 싸움은 장르적 영화로 굉장히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 당시만 해도 ‘사이보그’라는 키워드는 새로 맞이하게 된 컴퓨터 시대와 맞물려 SF 장르를 더 매혹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발전된 사이버펑크 계열의 작품들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과 상반되게 더 인간다워지는 기계들의 대비를 통해 고도로 발전하는 경쟁사회 속 상실된 과거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요즘의 어린이들은 어떠한 기계장치를 대하든 물리 버튼보다 터치화면에 익숙하다. 더 나아가 전쟁이나 사고로 팔을 잃은 사람들에게 뇌의 전기 신호로 움직일 수 있는 로봇 팔을 만들어주고,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인공 눈을 통해 빛을 보여주는 시대가 왔다. 우리가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보고 싶은 SF영화는 더 진보된 기술이나 아니면 적어도 다른 관점을 가진 작품을 원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전형성을 불식할 타개책 부재


일단 앞서 이야기했던 모든 것들은 [알리타]의 서사가 요즘의 관객에게 전혀 새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접근 방식을 택했어야 했다. 제임스 카메론도 그 사실을 인지해서 인지 모터볼 경기를 택했다. 하지만 그 부분이 애매하다. 전혀 새롭지 못한 서사들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원작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귀경길 친정어머니의 반찬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휴고와 알리타의 관계, 알리타와 이도의 관계, 휴고의 내적 갈등, 시렌의 변모, 알리타의 성장, 화려한 모터볼 경기까지 영화는 도무지 무엇 하나 집중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정작 주인공 알리타에게는 그렇게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다. 특히 알리타의 눈을 이질적으로 키운 탓에 더욱 그렇다. 

프로모션 당시부터 말이 많았던 알리타의 눈


물론 알리타의 눈을 극단적으로 키운 부분에 대해 일말의 변호를 하자면, 영화의 전체적인 메타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도 박사가 쓰레기장에서 알리타를 발견하기 전에 눈을 주워 담는 부분이나, 그루위시카가 알리타에 의해 눈이 파손되는 내용, 노바 박사가 자신의 하수인들의 몸을 조종할 때 인물들의 눈의 색이 바뀌는 경우 등 영화는 지속적으로 ‘눈’이라는 매개체를 상위 계급에 의한 ‘감시’와 ‘통제’라는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알리타를 기계 부품을 장착한 고철 도시의 시민들과도 괴리감이 들게끔 형상화한 이 인위적인 눈은 그녀의 존재 가치 의의나 노바라는 흑막이 고철 도시를 하나의 실험체로 사용한다는 의미를 영화 전체에 녹아내고 있다.   


고철 도시를 통제하는 거대한 '눈', 공중도시 자렘


영화 [알리타] 속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갈등하던 휴고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일당을 막는 과정에서 현상금 사냥꾼 자팡에게 쫓기게 되는 부분이다. 휴고의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의 충돌 및 사냥당하는 인간과 그를 쫓는 자팡의 추격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액션의 대부분을 할당하는 알리타의 액션보다 더 스릴감 있게 다가온다. 이 영화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제대로 시사하는 지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성장은 없고 각성만 남은 글래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