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벨벳 버즈소] 리뷰
※이 글에는 결말의 중요 내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이크 질렌할과 르네 루소의 재회에서 알아봤어야 하는 데, 영화를 보며 [나이트 크롤러]를 떠올린 게 우연이 아니었다. 특종을 찍어 방송사에 파는 일명 ‘나이트 크롤러’ 일을 접하게 된 한 남자가 탐욕 끝에 사건을 조작하여 성공하게 되는, 인간의 탐욕을 주제로 한 [나이트 크롤러]처럼 [벨벳 버즈소]는 욕망의 무대를 뉴스에서 미술계로 옮겨왔다.
내로라하는 아트 갤러리 사장인 로도라(르네 루소)는 유명한 예술 비평가인 모프 벤더월트(제이크 질렌할)가 극찬하는 예술작품들을 사전에 구입해 미술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로도라를 따라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 입사했지만 허드렛일만 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그녀의 비서, 조세피나는 우연히 자신의 아파트에서 죽은 노인을 발견하게 되고 그 노인의 집에서 매혹적인 그림들을 발견한다. 결국 모프와 로도라, 조세피나는 죽은 노인의 그림을 훔쳐 세상 밖에 내놓게 된다.
[나이트 크롤러]는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의 성공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소시오패스적 행동을 통해 그려냈다면 [벨벳 버즈소]는 미술계라는 직종에 종사하는 인물들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추악함을 예술적인 화려함과 대비되게 그려냈다. 특히 이 부분은 욕망에 휩싸인 영화 속 인물들이 예술작품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들을 통해 두드러진다.
영화 속 첫 번째 죽음인 브라이슨이 죽는 상황을 보자. 브라이슨은 로도라가 시킨 디즈 베트릴(죽은 노인)의 작품들을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그림의 값어치를 알고 훔쳐 달아난다. 그러다 그만 담뱃불이 옷에 옮겨 붙게 되고 사고를 낸다. 화상을 입은 브라이슨은 사고를 낸 건물로 들어가 상처 부위를 닦아낸다. 그는 거울 앞에 있다가 거울 위에 걸린 그림 작품에 의해 죽는다. 두 번째로 사고를 당하는 로도라의 경쟁 미술상인 존 돈돈은 자신의 설치 예술품 속 영사기가 작동되자 확인하기 위해 갔다가 화를 당한다. 뒤 이어 그레첸은 설치미술품인 구 모형의 조형물에 팔이 끼여 사망한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을 죽인 예술품들의 모습이다. 처음 브라이슨은 그림, 존 돈돈은 영사기, 그레첸은 구면체, 이후 로봇 조형물, 그래피티 작품 등으로 다양하다. 예술이란 우리의 삶, 생태, 관계 등을 대상에 투영하는 작업이다. 처음 우리를 담아냈던 것은 그림이었고, 이후 사진이 등장했으며 움직이는 사진(영화)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림은 인상파나 추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를 얼마나 정밀하게 묘사하는지가 예술 가치의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다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 수단들(사진이나 영화)이 나오게 되면서 예술은 현재를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발전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탐욕적인 인물들을 벌하는 예술 매개체가 그림, 영사기. 대상을 왜곡해 비추는 구면체 등으로 변모해간다.
예술작품에 의해 죽게 되는 등장인물들은 그 해당 예술작품에 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경쟁 상대인 로도라에게서 그녀와 함께 일하던 유명 작가 피어스를 빼돌린 존 돈돈은 과도하게 많은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설치 미술품에 의해 죽게 되고, 복제품에 불가하다며 폄훼한 ‘노숙맨’(로봇 설치 예술품)에게 죽는 모프는 주체적인 창조 없이 작품에 대한 평론만으로 지위를 얻는 인물이다.(평론이란 자기 복제의 끊임없는 재생산 구조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모프를 기점으로 뒤이어 사망하는 인물들의 예술 매체는 앞 선 인물들과는 결이 달라진다. 단적인 예로 조세피나를 죽인 예술은 그래피티로 거리의 문화, 스트리트 아트로 유명하다. 결국 삶을 투영하던 예술의 종착지는 삶에 녹아드는 예술인 셈이다.
[벨벳 버즈소] 속 탐욕적인 인물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인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담리시와 피어스이다. 담리시는 미술계가 주목하는 신성으로 스트릿 출신이며, 피어스는 아주 유명한 작가지만 술을 끊기 시작한 이후로 작품에 영감을 찾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 둘만이 디즈 베트릴의 작품들을 보고 앞선 인물들과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길바닥 출신 예술 크루들을 버리고 로도라 밑으로 들어가게 된 담리시는 디즈의 작품을 본 후 다시 자신의 크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며, 피어스는 그의 작품을 본 후로 자신의 작품에서 무언가 결여되어있음을 인정하고 잠시 요양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엔딩에서 파도치는 바닷가의 모래에다 홀로 곡선의 그림을 그리는 피어스의 모습은 화려한 개인 작업 공간과 많은 사람들 주위에서 괴로워하던 모습에서 탈피해 자유로워졌음을 보여준다. 결국 담리시와 피어스 모두 탐욕과는 거리가 먼 삶(스트릿)과 자연(바닷가)으로 돌아간 것이다.
삶을 투영하던 예술이란 여정이 돌고 돌아온 곳이 결국 삶(자연)이라는 것과 엔딩부의 피어스의 모래바닥에 수놓는 무한한 곡선들은 결국 탐욕이라는 인간 심연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란 언제든지 다시 나올 수 있음을 시사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이트 크롤러]가 심도 깊은 스릴러였다면 [벨벳 버즈소]는 화려한 미스테리 공포물에 가깝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서 [나이트 크롤러]가 가졌던 작품성이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과 만나 대중적이게 희석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넷플릭스라는 자본이 없었다면 [벨벳 버즈소] 속 각양각색의 예술 작품을 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작보다 인물들 간의 관계와 깊이는 옅어졌지만 그와 반대로 화려함은 배가 되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작품이다. 극 중 인물들이 차례로 죽는다는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설정이지만, 영화는 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