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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05. 2023

휴가는 아니고요, 휴직입니다

이게 뭐라고, 축하를 하세요?


축하받을 일은 아닌데

휴직이라고 친한 지인들이 있는 단톡방 몇군데에 알렸다.

- 얘들아, 나 휴직하게 됐어.


이어서 울려대는 알람. 

까톡 까톡.


- 잘됐네. 여행이라도 다녀와. 지금 아니면 언제 다녀오겠어.

- 오빠, 축하해요. 저도 진짜 요새 때려치고 싶은데, 경기가 어려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너무 부러워요.

- 어디라도 다녀와. 휴가도 제대로 못 가는데, 나같으면 3개월 장기로 한참 돌아다니겠다.


본가에 어머니와 식사를 하러 갔다가, 작은 거짓을 넣어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잠깐 쉬는거라고 하다가, 아주 작은 거짓을 넣었다.

- 어머니, 회사 잠깐 쉬게 됐어요.

- 아니 왜?

-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에게 휴가 다녀오라고 해서요. 잘됐네. 어디 좋은데라도 다녀와. 정말 좋은 회사네. 네가 일을 정말 잘 했나 보다. 축하한다, 우리 아들.

본의 아니게 휴직을 하고 나서 받은 축하가 입사를 할 때 받은 축하보다 많다.

까톡 까톡. 울려대는 축하.



# 어디로 떠나야할까?

 생각해보면, 지금 아니면, 언제 제대로 떠날 수 있겠는가. 3개월이란 휴직기간이 주어졌겠다, 정신 건강상 한국과 거리두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동남아 일주를 할까, 스페인으로 가서 산티아고 길을 걸을까.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적어놓은 버킷리스트를 펼쳐본다. 아내는 어디라도 다녀오라고 한다. 애가 있다면 다녀오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은 애가 없다. 다녀올 수 있다. 이 번 기회가 생에 몇 안되는 장기 여행의 기회일 것이다. 마땅히 다녀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기분 전환의 기회도 될 것이다. 경주마는 가림막 때문에, 옆을 볼 수 없다. 앞만 볼 수 있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마치 그런 가림막을 제거하고, 세상을 살필 기회가 될 것이다.



여행지 후보 1. 동남아 일주

동남아는 너무 편한 여행이 될 것 같다. 관광에 가깝지 않을까. 마사지 받고, 카페에 앉아, 스무디를 쪽쪽 빨고, 해변에 가고, 스노쿨링을 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비치베드에 누워 멍 때리고, 맛난 음식을 먹고. 제대로 힐링이 될 것 같다. 태양을 많이 받으니 비타민 D를 쭉쭉 빨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 후보 2. 스페인.

스페인을 간다면 이유는 산티아고 순례길 때문이고, 가고자 하는 코스는 프랑스 길은 800km에 달하는 긴 코스다. 하루 보통 25km 정도를 걸으면, 34일 정도 걸린다. 여행 일정은 단순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7시간쯤 걷는다. 알베르게(숙소)에 도착한다. 씻고, 정리하고 밥을 먹는다. 산책을 한다. 숙소에 있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놀 꺼리는 없다. 해변도 없고, 스노쿨링도 없다. 알이 배기고, 근육통이 생길 뿐이다.

 적어 놓고 보니, 동남아보다 스페인에 흥미를 느낀다. 나는 통증을 원한다. 온 몸 가득 여기도 아파, 저기도 아파, 라고 외치는 팔의 고통, 다리의 고통, 어깨의 고통, 숭모근의 고통 등등을 느끼고 싶다. 몸의 아우성으로 지금 현재를 채우면, 정작 중앙 통제소인 뇌는 생각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 몸의 민원을 처리하느라, 정작 집착하고 있던 문제에서 떠날 수 있을 테니까. 


 휴직을 해도 끊임 없이 떠오르는 회사 생각을 벗어나고 싶다. 회사 일이란, 삶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껌딱지같다. 해 비치는 오후, 누군가 씹다 뱉은 아스팔트 위 껌. 밟는다. 껌은 씹은지 얼마 안 되었는지, 끈끈하다. 발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괜히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다. 리듬이 어긋난다. 괜히 신경질이 난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다. 이게 다 껌딱지 때문이다. 신경쓰인다. 머릿 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껌딱지를 떼려면 고통이 필요하다. 가끔은 몸이 질러대는 비명이 도움이 된다. 

동남아를 가야할까, 산티아고를 가야할까. 



# 그런데 이걸 고민하는게 맞아?


휴직을 하게 되었다. 3개월의 시간이 생겼다. 건강해지기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한 시간이다. 아마 다시는 똑같은 기회가 또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한 기회이다.

2023년의 매미에겐 올해가 유일한 여름이자, 마지막 여름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긴 휴직은 이번뿐이다, 아마. 동남아를 갈까, 산티아고를 갈까, 휴가지를 고르는 것처럼 들뜬다. 


그런데 다른 이들에겐 일하다 휴가 시즌에 가는 휴가가 맞겠지만, 나도 그럴까?

들뜬 열이 가라 앉는다. 매미의 울음이 낮아진다.




#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잘 쓰는 것일까?

동남아에서 마사지 받고 맛난 음식 먹고 쉬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도 마찬가지다. 34일이란 시간이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휴직 기간 1/3에 해당하는 시간을 투자하기엔 너무 부담이 된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3개월동안 가장 하고 싶고, 나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할 일이 꼭 여행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쉬니까, 이번 기회에 길게 여행 가라는 사람들의 의견에 생각 없이 따른 것은 아닐까.


정말 중요한 것은 

다시는 번아웃 되지 않기 위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여행은 충분히 밀도 있지만, 그보다 밀도 있는 수단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바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이다. 하지만 왜 그 길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효용성은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에세이나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뭘 쓴다고 사람들이 봐줄까. 


문득, 얼마 전 읽었던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지음)>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내가 뭘 써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생산성있는 활동이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인정을 받는 것도, 빵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무쓸모이기 때문에, 괜찮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공기 놀이를 하듯, 공기돌을 위로 던지고 던지듯, 

그것이 크게 의미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듯이. 

만약, 그 공기돌 하나 하나에 돈이 달렸거나, 생명이 달렸다면, 웃으면서 던질 수 있을까. 

무쓸모 하니까, 웃을 수 있는거다.


치유가 되는 것. 예방을 하는 것. 나만의 상비약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공기돌을 던지듯이 글을 쓰는 것.



# 난 왜 번아웃에 걸렸을까.

두려움에 대해 쓴 어떤 책에서 현대 직장인들이 번아웃에 걸릴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현대 회사의 구조가 지닌 모순 때문이라고 한다.


● 회사는 성장하고자 할수록 개인에게서 통제력을 빼앗는다.

● 회사는 더 성장하고자 하지만, 개인의 통제력은 작아진다.

→ 그러면 회사의 KPI(목표)는 높은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 무기력해진다. 목표는 높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무기력해진다. 번아웃에 걸리기 딱 좋다!


나 역시 통제력을 잃어왔다. 팀장이지만, 권한이 없었다. 통제력이 없었다. 정해진 결정에 따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새로운 의견이나, 다른 의견을 내도, 변하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일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결과는 같았다. 나의 능력은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팀장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공기돌을 던지듯이 가볍게 글을 쓰는 것이다.

번아웃은 강한 기대치와 약한 통제력의 조합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낮은 기대치와 강한 내적 통제력의 조합이다. 내적 통제력이 더 강해질수록, 더 건강해지고, 그것은 나의 상비약이 되어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 통제력

인생이 어떻게 변하든, 내 인생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주관적 관점에 대한 권력은 내가 갖는다. 객관성은 결국 주관적 관점에서 시작한다. 내 관점이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 짓는 가장 큰 요소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내적 통제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진정 갖고 싶은 것)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회사가 내 삶을 떠 먹여주든, 아니든, 누가 내 예쁜 뒷통수를 이빠이 후려치든, 말든, 그렇다고 할지라도, 겁나 아플지라도, 눈물 쏙 빼고, 돌아갈 수 있는 일상.

통제력을 가진 일상.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면의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일상.

(갖고 싶다)


 글을 쓰는 나

동남아에 갈까, 산티아고에 갈까.

어디를 가든, 어디를 가지 않든,

글을 쓴다.


그것이 3개월의 휴직동안 만들어야 할 나의 상비약이다. 

약의 조제는 간단하다. 그것은 나도 만들 수 있는 간단하지만, 좋은 약이다.



이건 너무 많아. 너무 많은 약은 오히려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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