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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10. 2023

나 사실 예민한 사람(feat.개복치)

예민한 사람도 예민한지 모르고 있을 수 있다. 해보자! 예민함 테스트!



휴직하기 전에 사직원에 적은 퇴사 사유


"건강 상의 이유로 퇴사하고자 합니다."

'건강 상의 이유' 라고 했지만, 앞에는 생략한 단어가 있었다.


(정신) 건강 상의 이유

 육체는 과할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세자릿수 체중이었다.102kg 하지만 정신은 물기 한방울 없이 바싹 말랐다. 링에 오르기 전 체중감량을 한 복싱 선수처럼.


 회사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정신)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도저히 (정신)을 괄호 밖으로 꺼내놓고 싶지 않다. 꺼내놓고 보면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육체가 병들었다면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졌거나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차라리 피를 토한다면,


 퇴사가 문제가 아니지. 어떻게 건강해질지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신) 건강은 인간으로서 역량의 문제로 느껴진다. 비정상 인간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최대한 참았다. 하지만 한계가 왔다. 더 이상 회사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면 살갗에 따가운 바늘이 꽂힌듯 찌릿하다. 그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힘들다. 동료들이 저 멀리서 얘기를 하거나, 업무 중에 말소리가 들리면, 나에 대한 욕이나 험담처럼 들린다. 소리에 가까운 환청이 들린다. 눈빛에서, 의미 없는 작은 행동에서 모두 나를 싫어하고, 해치려 한다는 망상이 든다. 그들이 나를 적대하는 이유는 내가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거친 물살처럼 밀려드는 생각을 막을 수 없다. 어쩐지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죄일지 모른다는 생각 마저 든다.

- 7월의 어느 날, 퇴사를 결심하고서 쓴 기록 -


 그래서, 만 39세, 사직원을 냈(었)다, 만 반려받고, 휴직 중이다.



예민함에 대하여


 얼마 전,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예민함 테스트가 나와 같이 해봤다. 평소 아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후각이 예민하서 어디선가 냄새가 나면 곧잘 알아챘다. 내 발냄새를 포함해서, 음식물 썩는 냄새, 냄비 타는 냄새, 상한 음식의 시큼한 냄새도 금새 알아챘다. 잠귀도 밝아서, 내가 코를 골거나, 밤중에 문을 열면, 그 소리에 쉽게 깼다. 그래서 아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싶어서 테스트를 해보라고 한 것이었다.


 아래 문항 중 7개 이상이면, 예민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내는 당연히 7개 이상 나올 거라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해당하는 게 별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28개 문항 중 아내는 6개, 나는 11개에 해당했다.


 스스로 몰랐지만, 나는 사실, 꽤 예민한 사람이었다. 예민함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오히려 둔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찔러도 5초 후에야 아야하고 소리를 질렀고 (학창시절, 일진들이 장난이랍시고 종종 펜으로 찔렀다)불 켜진 상태에서도 잠만 잘자고, 자리도 가리지 않아서, 산이든, 길거리든 누울 데만 있으면 잘 잤다. 먹는 것도 주는대로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날씨에도 민감하지 않아서, 비가 오면 그냥 맞고, 더울 때 긴팔, 추울 때 반팔 입는 경우도 많았다. 햇빛이 가장 강렬할 때도, 선크림 바를 생각도 안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곰처럼 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예민함 테스트에 체크한 문항들을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감각에 둔할지언정, 관계에서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나는 관계에서 불안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사람이었다. 사람 관계에서 경계를 높이는, 예민한 짐승이었다.


<내가 체크한 항목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지 항상 걱정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사람들에게 소심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항상 긴장 속에 사는 것 같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설사나 변비에 시달린다.
긴장하면 호흡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쉽게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권위적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


 예민한 짐승이라서 관계에서 쉽게 상처받고, 굴 속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예민한 반면에, MBTI는 E형이라 사람들과의 만남을 추구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에너지를 얻지만, 그것 이상으로 관계에 예민해서 신경쓰느라 에너지를 소모했다. <예민하고 모순적인 짐승, 그게 나였다>


 반면에 아내는 예민함 테스트에서 7개 이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내가 정말로 예민했다면, 나와 같이 살 수 있었을까. 혹은 내가 같이 살 수 있었을까. 아내와 내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성향이 어느 정도 맞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향상 아내가 나를 많이 참아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하고 모순적인 짐승을 이해해주는 이해심 많은 아내>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예민하다는 건 뭘까?

 사전을 찾아보면, 예민하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난 것이라고 나와 있다.영어로는 SENSITIVE. 

 섬세한, 주의 깊은, 배려심 깊은 등의 뜻이 있다. 

 관계에서 예민하다는 것은 남의 기분을 헤어리는 데 세심한다는 뜻이다. 내가 아닌 타인이 중심이 된다. 남에게 안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부탁이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유리멘탈이다. 깨지기 쉬운 유치처럼 타인의 시선이나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쉽게 상처나 충격을 받는다. 부정적인 피드백이 다가왔을 때, 원래보다 2-3배 더 큰 충격을 받는다.


 회사에서 내 패턴은 다음과 같다. 사장님이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기대가 점점 커진다. 성과가 좋을 때도 있지만,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성과가 좋지 않을 때 자책을 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데서 죄책감을 느낀다.


 왜 이렇게 힘들어할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오히려 타고나기를 이렇게 타고났으니, 당연한 결과였다.아무리 열심히 해도 타인의 기분이나 말, 행동에 민감하다보니, 패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곰처럼 둔한 사람이 아니라, 예민함이 과한 사람이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지만, 그게 과민한 대장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현재 휴직 중이다. 회사 사람 안 보고, 일 얘기 안 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고,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쓰니까, 세상 편하다. 언제 그렇게 고통스러웠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내 병이 완전히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자극을 받으면 금새 나빠질 수도 있다. 예전엔 곰처럼 버티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곰이 아니다. 깨고, 느끼고, 생각하기 쉬운 사람이다.


이제 예민함의 방향을 조금 바꿔 보려 한다. 타인이나 바깥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향하기.

남 눈치 덜 보면서, 내 생각과 기분에 더 집중하면서.

나 자신에게 예민한 사람으로.


그럼, 뭐라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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