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남 Sep 06. 2023

휴직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10가지

휴직 생활의 절반을 지나며, 중간 복기

한 회사의 마케팅 팀장으로 일했다. 최선을 다해 일했다. 어느 날 공황과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나는 회사에서 누구보다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MBTI도 ENFP였다. 관심받기 좋아하고, 멍석 깔아주면, 신나게 놀 줄 아는 사람이었다. 회의든, 회식이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남들이 칼퇴할 때도 알아서 야근을 하고, 그렇다고 부하직원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야근을 강요하는 꼰대는 아닌 열린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인 줄 알았다.


어느 날, 회사라는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같이 웃고 회의하던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늘 하던 일이 음 하는 일처럼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듯 이질감을 느꼈다.

나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청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하고, 겁 많고, 내향적이고, 혼자 있고 싶어 하며, 사람을 기피한다.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 다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고, 아슬아슬하게 쌓아온 탑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육체에도 영향을 줘서, 특정 조건이 되면, 과호흡증상이 일어났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로 따갑고, 맞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퇴사를 하려고 했었지만, 회사에서는 휴직이라는 기회를 주었다.

3개월의 휴직 기간 중 절반이 지났다. 중간 복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 쉬고 있는가. 잘 쉬어서 에너지를 충전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회사에 돌아가는 것만이 답일까. 혹은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건, 강해질 수 있을까.


절반이 지나가는데도, 어느 질문 하나 명료하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 아직도.


휴직할 때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게 있다. 휴직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10가지.

휴직할 때, 메모장에 하고 싶은 일 10가지를 적었다.

휴직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10가지 (취소선이 실행한 일)

1. 회사 메신저 삭제

2. 몇 년 동안 못 뵌 인생 멘토 두 분 찾아가기

3. 무인도에서 한 권만 가져간다면 꼭 가져갈 인생 책 찾기

4. 카톡 친구 리스트 정리

5. 몇 년 동안 못 쓰고 있는 중편 소설 탈고하기.

6. 혼자서 한 달 여행 (마음 정리)

7. 마라톤 대회 10km 나가기

8. 업무와 관련 없는 책 소설 읽기 10권

9. 브런치 작가 다시 도전

10. 아내와 국내 여행


핸드폰에 설치된 회사 메신저는 휴직하고 일주일째 되는 날 지웠다. 메신저를 지우기 전엔 대화가 오가는데 참여하지 않아서 착잡하고 갑갑했는데, 메신저를 지우니까 자유로워졌다. 생각도 행동도.


인생 멘트 두 분을 만났다. 한 분은 예술가고, 다른 한 분은 정치가다. 그래서일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메시지가 달랐다고 해도, 여전히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 주고, 시간을 할애해 준다는 데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힘이 되었다.


인생 책을 정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으로 하기로 했다. 얼마 전 추천을 받아서 다시 읽어봤는데, 인생을 통틀어 가져가야 할 키워드와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읽은 메시지 중 하나는 '소외받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이번 동남아 여행에도 함께 하기로 했다.


카톡 친구 리스트를 정리했다. 1,000명이 넘는 친구들. 등록하고, 한 번도 대화하지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다. 업무 단톡방에서 한 번 대면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다. 반나절이 걸렸다. 걸러놓고 보니, 1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이 남았다. 이것도 꽤 기준을 여유롭게 잡아서 이 정도.


스페인 산티아고냐, 동남아냐, 고민 끝에 동남아 여행으로 정했다. 태국 방콕에서 출발해서 라오스를 거쳐 베트남 하이퐁으로 마무리할 것이다. 이 여행에서 아직 끝내지 못한 답변들에 대한 질문과 답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얼마 전 생애 최초로 마라톤 10km를 완주했다. 하루키를 떠올리며, 한 번도 걷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브런치 7번 떨어졌고 8번째 만에 작가 신청 통과했다.



휴직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 10가지 중 6가지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뭔가 하고 있었구나, 여섯 개나 했구나 싶어 스스로가 기특하다.

10가지를 다 하면 충분히 쉬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회사로 돌아갈 용기를 얻지 않을까. 10가지를 달성하는 게 목표가 되어선 곤란하지만, 일단은 10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 전혀 상관없는 인생의 점들이 연결되며, 나에게 필요한 표지를 들려줄 거라 믿는다.




[예고]

다음은 동남아닷!

한 달이라는 시간, 동남아 여행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점에 대해 이어서 쓰고자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상여 2백만 원, 부럽지가 않아,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