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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Aug 27. 2023

상여 2백만 원, 부럽지가 않아,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10km 마라톤 완주 소감, 도파민 최고!


"헐, 회사 사람들 전체 다 2백만 원씩 받았대!"


새벽에 눈이 일찍 떠졌다. 문득, 회사 그룹웨어에 들어가 봤다. 휴직하고 나서 처음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괜스레, 회사에 무슨 일은 없나 새벽 감성에 궁금해졌던 걸까. 게시판에 공지사항이 하나 떠 있었다.


사옥 이전 기념 전 직원 상여 2백만 원 지급

(단, 휴직자 제외.)


그래서 아침엔 마음이 불편했다. 전 직원에 휴직자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직자를 제외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휴직하고 있는 사람도 포함하는 게 오히려 공정하지 않은 처사이니까. 다만, 괜한 생각이 들었다.


휴직을 보름 정도만 늦게 했어도 받았을 걸.

보름만 더 참았어도 이백만 원이 통장에 추가로 꽂혔을 걸.

껄무새가 어디선가 울었다. 껄~껄~껄~

내 마음 속 껄무새!


아내에게 전 직원에게 2백만 원이 들어왔다고,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받았을 텐데

   됐어. 그때 엄청 힘들었잖아. 잘 쉬었어. 이백만 원 없어도 살아.


듣고 싶은 말을 들으니까, 서운한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아내의 무심한 말투가 고마웠다. 이백만 원을 아까워하며, 저런 저런, 어쩜 그래, 하며, 회사를 욕하거나, 이백만 원을 안타까워했다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오래 괴롭히고 원망했을 것이다.


조금 불편했지만, 아침에 잡힌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다. 마라톤 대회.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던 것도 설레임 때문이었다.


휴직하고 나서 하고 싶은 10가지 중 첫 번째, 가장 하고 싶은 한 가지가 바로 마라톤 참가다. 나 인생 최초로 10km를 달린다. 공식, 비공식 단 한 번도 10km를 한 번에 달린 적 없다. 5km 달리기로만 연습해 와서 더 큰 도전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키미 하루키는 매일 달린다. 언젠가 하루키처럼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고 싶다. 오늘은 그 첫걸음이다.



 9시 출발 땅!


출발은 순조로웠다. 평소보다 컨디션도 좋았다. 뚝섬 유원지에서 출발해, 천호대교 근방까지 달렸다가 돌아오는 코스. 5km까지 달릴 때만 해도, 한 번도 제쳐지지 않고, 수십 명을 제치면서 달려 나왔다. '나 좀 뛰는 걸. 혹시 달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5km 지점부터였다. 5km 이후로는 뛰어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미지의 행성.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졌다. 아까 제쳤던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나를 제치기 시작했다. 점차 뒤처졌다. 아무리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도 딱 한 가지만 기억하기로 했다.


   완주 목표 : 더 좋은 기록이 아니라, 걷지 않는 게 목표!


하루키처럼, 나도 뛰기를 멈추지 않겠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무도 어렵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전력을 다해서 매달리고,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단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다음에 하면 되지. 내가 하루키도 아닌데,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조차 쉽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여태까지 얼마든지 그만둬 오지 않았나. 여태까지 늘 멈추고, 포기하는 일 천지 아니었나. 그런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씁씁 후후.

   점차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 위를 걷듯이, 달리는 나.

   너무 느리고 지루한 영화.

   무슨 의미가 있지?


태양이 너무 뜨겁다. 달리기에 좋지 않은 온도다. 25도가 넘었다. 태양은 따갑고, 걷는지, 달리는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어느새 하루키가 옆에서 달린다.


   의미는 없다. 의미가 있으면 달리고, 없으면 멈출 텐가. 의미를 누가 정하는데?

   인생은 의미가 있나.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을 거야? 인생의 의미를 누가 정하는데? 멈춰야 될  궁리 그만하고, 오늘은 일단 달려. 다 달리고 나면 좋은 걸 가르쳐 줄 테니.


좋은 거, 좋은 거. 하루키를 따라 달리다 보니, 결승점이 보였다. 저 멀리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온 힘을 내서 결승선을 넘어선다.


최종 기록 01:16:07.47

전체 순위 483 / 669

감격의 10km 완주 메달

기록은 기록이고, 중요한 것은


걷지 않았다.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뛰었다.


그 사실이야말로, 야수처럼 함성을 지르게 하는 쾌감.

도파민 과다 합성 때문인지 웃음이 자꾸 나왔다. 이것이 러너스 하이인가 싶었다. 숨찬 게 좀 가시자, 쉴 새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멈춰지지 않았다. 달릴 때 숨차서 하지 못한 말, 떠오른 생각들이 말려 있던 필름이 한 번에 풀려 나오듯, 튀어나왔다. 약에 취한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먼 싶었다.


좀 진정되고 나서 아내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때? 이백만 원 생각나? 아까워?


아내의 얼굴에 하루키가 겹쳐 보인다.

나는 어느새 장기하가 된다.


   장기하 식으로 ) 이백만 원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이백만 원 받았으면 뭐 해. 스트레스받았을 텐데. 내가 버텼을까. 아니, 아니 못 버티고 골골대고 있었을 거야. 그랬으면 말이야. 지금 마라톤도 뛸 수 없고, 지금 이 기분도 느낄 수 없고, 이 경험, 경험 못 하는 거야.


만화 원펀맨의 사이타마처럼  매일 꾸준히

사이타마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리면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처음  짤을 봤을 때는 그 정도 가지고, 히어로가 될 수 있겠냐 생각했는데,

뭐든지 직접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다. 10km를 한 번 달린 나도 스스로 어제의 나보다 히어로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10km를 달린다면 진짜로 매일 달리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마이 월드'에서는 가장 멋진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멋진 경험을 매일 할 수 있다면, 하늘을 날고, 산을 부수고, 레이저를 쏘지 못한다고 해도, 가슴속에 빛나는 <근자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근자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고,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매일 꾸준히 멋진 경험을 해냈다는 성취감 자체가 자신감의 근거가 될 것이다.


상상 속의 하루키가 말했던 끝까지 달리면 좋은 걸 준다고 했던 거, 근자감의 씨앗이 느껴졌다.


너 잘났어? 그래, 나 10km를 한 번도 안 쉬고 달렸어.

돈 많아? 그래, 나 10km를 한 번도 안 쉬고 달렸어.

너 잘 생겼어? 그래, 나 10km를 한 번도 안 쉬고 달렸어.


씨앗을 틔우고, 키워나가기 위해, 다시 또 달리기로 다짐해 본다. 내 세계의 히어로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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