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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Dec 17. 2023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친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불안한 인생을 확정시키지 않는 방법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친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락처는 저장되어 있다. 핸드폰에 이름이 뜬다.


'큰 고모 큰 고모'


큰 고모가 누구였더라. 한참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왕래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성인이 된 후에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떠나고, 다른 삶을 선택한 이후, 친가 쪽 친척들과는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피가 이어져 있다곤 해도, 그 진하기가 옆 집 이웃사촌보다 진하진 않을 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락을 한 적도, 온 적도 없기 때문이다.


큰 고모의 이름을 모른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전화를 받은들 나는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가 큰 고모라고 확신할 수 없다.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분간할 수 없다.


당황한 포인트는 큰 고모에게 연락이 왔다는 것도 있지만, 이 번호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는 자체였다. 내가 저장했을까. 왜 그랬을까. 언제 그랬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서를 타고 들어가 최초의 사건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만, 기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낯선 전화에 당황하는 동안에도 전화는 끝까지 울렸다.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낯선 전화에 담겨 있을 메시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길한 소식을 담고 있으면 어떡하지.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떠오른 몇 가지 불길한 상상.

1. 큰 고모와 같이 살고 있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

2. 큰 고모와 같이 살고 있다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까.

3. 큰 고모가 돌아가셔서 전화가 온 것일까.

소식을 모르는 이들의 <죽음>이 두렵다.


그나마 덜 두렵고, 덜 불길한 예상 몇 가지.

1.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갑자기> 우리 가족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 동생, 나의 소식을 묻는다.

2.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가장 확률이 낮은 상상이다. 이십 년 만에 연락 와서 그러지는 않겠지.

3. 돈을 갚으라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가 빌려갔을 돈. 빌려달라는 것보단 이 쪽이 오히려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액수와 범위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꽤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4. 연락 한 번 안 하냐며, 피도 눈물도 없냐며, 조만간 시간 내서 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이 쪽에 있는데, 어떻게 한 번 오지 않냐며, 욕을 할지도 모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받지 않는 전화에 어떤 소식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다. 받지 않는 동안에는 모든 가능성이 다 존재한다. 상상한 모든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예상한 범위를 넘어선 다른 무엇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전화가 온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확정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확정되지 않은 채로, 유보시키고 싶다.


이것이 최근 삶을 대하는 태도다.

유보한다. 보류한다. 지연한다. 피한다. 도망친다.

모든 삶으로부터.


똑바로 삶을 대면할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피해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확정하는 순간 삶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삭막한 풍경이 그대로 형체를 드러낼 것만 같다.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추한 몰골이 드러날 것만 같다.

하루종일 불길한 소식이 다른 경로로 전해질 것이란 생각에 불안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어머니나 동생이 소식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내게 토스될 것이다. 동생이나 어머니에게 전화가 올까, 하루종일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불길한 소식은 아니었나 보다. 안심했지만, 큰 고모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가 큰 고모일 거라는 확신이 없으니까. 확정되지 않은 상상이 현실이 될지 모르니까. 낯선 친척과 마주할 만큼 불모지 같은 인생에 자신 있지 않으니까.


큰 고모, 아니 인생과 또다시 대면하지 않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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