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새비지의 <파워 오브 도그>를 읽고
가끔 필은 모든 사연을 다 털어놓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그가 술을 증오하는 한 가지 이유였다. 그는 술이 두려웠다. 술에 취해 무심코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사연이. (p.30)
아, 재밌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별 흥행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베네딕트 컴버베치를 주연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꼭 읽어봐야지 싶었다. 오이씨라면 무조건 봐야지! 서부의 냄새가 물씬 나는 배경의 이야기로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서부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도 재밌었다. 필의 비중이 높긴 하지만 필과 조지 두 형제의 이야기다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요 네스뵈의 킹덤이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을 요 네스뵈가 썼다면 800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서부의 황량하고도 거친 느낌이 잘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천 마리의 소가 있는 버뱅크 목장의 이야기이며 목장을 운영하는 필과 조지 형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형 필과 동생 조지는 마치 정 반대의 사람처럼 다르다. 형 필은 날렵하고 매우 똑똑하며 못하는 것이 없었고 강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목장주이며 동생 조지는 그에 비하면 똑똑하지도 못하고 느리지만 대신 꾸준한 성격이다. 비록 사람들을 재밌게 하지 못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필과는 다르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어 아량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정반대의 사람이라 둘은 짝꿍 같은 각별한 사이다.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꽉 잡고 가는 인물은 형 필인데 이 사람은 나쁜 사람 같기도 하고 또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하고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혐오를 감추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며 감정을 감출 생각도 전혀 없다.⠀
저기, 필 아주버님, 마침내 로즈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네요. (...) 필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로즈를 보며 똑똑이 말했다. 누구보고 아주버님이래. (p.137)
어느 날 동생 조지가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로즈와 결혼했다며 버뱅크 가로 데려오면서 이야기가 재밌게 흘러간다. 버뱅크 가에 온 첫날, 어려운 아주버니 필에게 인사말을 건네자 필이 차갑게 웃으며 한 말은 " 누구더러 아주버님이래."였다. (덜덜덜) 누가 시누이가 무섭다고 그랬나요? 아주버니가 훨씬 무섭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알았어요...) 이때부터 로즈의 '필'살이는 시작된다. 말 한마디 섞지 않고 그저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필, 이야기가 진짜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읽는 나도 너무 불안했고 로즈랑 같이 나까지 신경쇠약에 걸린 느낌이었다. 로즈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피터가 있다. 아빠를 닮아 똑똑하고 명철한데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아들. 필은 '암사내'라고 부르며 피터에게도 모욕을 주었는데 거친 남자들의 세계인 서부라는 장소적 배경과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긴 했지만 필은 정말이지 참 어려운 인물이다. 좋든 싫든 읽는 내내 필에 대한 호기심을 끊을 수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이 이야기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종잡을 수 없는 피터란 인물도 불안하고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이끄는 데 한몫했다. 마지막 결말은 놀래버렸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필의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뾰족하고 예민한 성격은 지난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완벽한 필, 모든 사람 위에서 군림했고 실제로 그럴 자격과 실력이 있었던 필이 유일하게 거부당했던 경험이자, 우러러보는 대상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그 경험 말이다. 자업자득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내 필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지만 책이 끝났음에도 필에 대한 호기심이 사그라들지 않은 느낌이다. 더 알고 싶다.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오이씨가 해석한 필은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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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버크롬비 앤드 피치'를 '애비 에미 앤드 새끼'라고 한 것은 정말 웃겼다.
* 태그 검색해도 책 얘기는 없어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