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을 읽고.
말하자면 이선의 밥그릇은 첫술을 뜰 때부터 질병과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었던 거지. p.17
작년 여름에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었고, 겨울이 성큼 왔다는 걸 느낀 어느 날에 <이선 프롬>을 펼쳤다. 짠하고 답답하다는 후기를 워낙 많이 봐서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가슴이 꽉 막혔다. 협심증 오는 줄 알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선의 상황이 이해가 가면서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선 어떤 쪽으로든 결단을 내리고 빨리 실행을 하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디스 워튼의 감정 묘사는 탁월했다. 가만 보면 작가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사회적 계급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글감이었던 것 같다. 특히 지나가 의사를 만나러 가고 매티와 이선만이 집에 남은 날 저녁의 묘사는 압권이었다.
작품 연대기를 보니 <여름>보다 <이선 프롬>이 훨씬 전에 쓰였다. <이선 프롬>은 실제로 작가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중에 쓰여서 이다지도 답답한, 출구 없는, 다 같이 나락으로 빠지는 파괴적인 관계를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여름>을 썼다. 특별히 <여름>이 더 좋았다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작가 본인은 <여름>에 가장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행했던 결혼 생활 끝에 그야말로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작가가 굉장한 의미를 부여했으리라고 본다. 이선도 매티를 사랑하고 채리티도 하니를 사랑하건만 이다지도 색깔이 다르다니.
그는 말 없는 우울한 풍경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고, 그 안의 온기와 마음은 표면 아래에 꽁꽁 묶인, 말하자면 얼어붙은 슬픔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 나는 단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그가 너무나 깊은 정신적 고립 속에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p.18
나에게 <이선 프롬>은 하얀 눈에 드리운 그림자의 연푸른 빛으로 기억될 것 같다. 새벽의 깨끗하고 보송해보이는 눈 쌓인 겨울 풍경이 아니라 차갑고 외롭고 축축한 겨울 풍경 말이다. 너무 쓸쓸한 나머지 삶의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름>보다 <이선 프롬>의 이야기가 더 여운이 길지만 풍광의 묘사는 <여름>이 더 강렬했다. 찬란하게 눈부신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알싸한 박하 향기가 나던 여름 풍경이 지금도 전혀 잊히지 않는다. 이선과 매티가 파괴적인 선택을 한 것은 놀랍지 않았다. 되려 이후의 삶이 너무 난폭하게 느껴져서 충격을 받았다. 이선도, 지나도 너무 끔찍하다. <여름>을 읽었을 때, 그것이 성장소설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채리티가 풋내 나는 사랑 후에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 성장했다기보다는 그저 감정적으로 늙어버린 것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선 프롬>까지 읽고 난 후엔...? 적어도 <여름>의 채리티는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선... 아... 모르겠다, 그만큼 답답하고 답답하다. 근데 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너무 이해는 간다. 그래서 더 답답한 것 같다. 이후 이선과 지나, 매티는 어떻게 살아갈까? 아무 기대도 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겨울 그림자 속에 갇힌 기분이다. 아무리 두꺼운 양말을 겹겹이 신어도 이미 눈에 젖은 신발 안에선 무용지물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