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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서가 Dec 28. 2022

속절없이 흘러가는 운명

위화의 <원청 ; 잃어버린 도시>를 읽고

위화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은데 정작 난 아직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했다. 이번에 출간된 신작 <원청>으로 첫 발을 디뎌보겠다 마음먹고 읽었는데 아, 진짜 페이지가 잘도 넘어가더라. <파친코>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소설 속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인물들의 삶 역시 속절없이 흘러가니 나 역시 속절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부모가 모두 죽고 홀로 남은 린샹푸 앞에 아청과 샤오메이 남매가 나타나면서 이들의 가혹한 운명은 시작된다. 고향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샤오메이를 남겨두고 떠난 아청은 돌아오지 않고, 린샹푸와 샤오메이는 함께 지내다 사랑하게 되고 혼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재산 일부를 들고 사라지고 린샹푸는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몇 달 뒤 배가 부른 샤오메이가 돌아오고 제발 옆에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청한다. 사람 좋은 린샹푸는 다시 샤오메이를 받아주고 아이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딸아이를 낳고 한 달 후 샤오메이는 다시 사라진다. 대체 샤오메이는 무엇일까. 린샹푸는 아청과 샤오메이 남매를 찾아 나선다. 그들이 고향이라고 했던 '원청'을 향해 모든 짐을 어깨에 싣고 갓난아이를 안은 채 긴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가 원청입니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는 원청이라는 곳을 찾아 떠돌다 '시진'이라는 곳에 닿은 린샹푸는 그곳 사람들의 말투가 아청-샤오메이 남매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청은 그들이 꾸며낸 이름이며 아청-샤오메이의 이름조차도 꾸며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시진에서 갓난아이의 젖동냥을 하며 단서를 찾아 헤맨다. 백 명의 젖을 물고 자라난 아이라 해서 딸의 이름을 '린바이자'로 짓고 이 과정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연을 맺으며 본격적인 시진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청나라가 저물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때다 보니 어지러운 난세와 함께 그들의 삶은 마치 촛불과 같았다. 격동하는 시대의 잔인한 비극 속에서 억척같이 살아남는 사람들의 모습은 <파친코>를 연상하게 한다. <파친코>도 굉장히 오랫동안 쓴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데 <원청> 역시 집필 기간만 23년이라고 한다. 20세기 중국을 문학으로 복원하는 것이 위화의 꿈이었다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인연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세상 풍파로 내몰 수 있는지를 가만 생각해 보면 놀랍다. 또 원하지 않았던 시대에 내던져진 채로 격변기의 잔혹함에 맞서거나 순응하면서 악착같이 생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시간의 급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이건 아직 시작도 시작되지 않고. 끝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 위화


샤오메이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이야기다. 대체 샤오메이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사연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후반에 가서야 알게 되는데 사실 처음에는 좀 화가 났다. 이런 이야기에 린샹푸의 인생이 꼬여든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인간의 인생은 스스로가 한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린샹푸라는 사람은 아름다웠기에 과연 그가 그렇게 세상 풍파에 내쳐질 만한 사람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잔혹한 상황에서도 천융량과 리메이렌, 구이민과 같은 올곧은 사람들이 있어 살아갈 수 있었던 린샹푸처럼 나 역시도 그들이 있어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위화의 작품이 처음이라 사실 장강명 작가가 추천사에 쓴 '위화적 순간'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위화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 궁금해진 건 확실하다. 아마 다음 작품으로 <허삼관 매혈기>를 읽어보게 될 것 같고 그다음은 <인생>이 될 것 같다. 



+++  

     린바이자와 구퉁녠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퉁녠은 남자인데 왜 또 갑자기 여동생이라는 건가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는데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구퉁녠'과 '구퉁넨'으로 글자가 달랐다. 와... 읽는 동안 최대의 위기였어.

     후반의 샤오메이의 이야기까지 다 읽고 나니 이거... 중국판 영화 '접속'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칠 듯 스치지 않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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