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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서가 Feb 15. 2023

일기가 된 읽기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을 읽고

짙은 노랑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서문이었다. 가끔 나는 서문을 읽다가 목이 콱 막혀버리곤 하는데 이 책도 그랬다. 읽어보고 싶었다. 쓰지 못한 이야기 안을 헤매며 사는 사람, '덜' 중요한 것을 쓰고 싶다는 야심에 자주 실패하는 사람, 자신에게 책을 포개어 읽는 사람, 밑줄을 따라 인생을 걷고 있는 사람,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는 사람의 글을.


아버지는 자살했다...는 어둡고도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시사IN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슬픔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예기치 않게 인생의 곳곳에서 불쑥 나를 방문하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 여성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덩달아 생각이 많아져 가만가만 멈추곤 했다. 저자의 글은 아주 단단하다.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비관적이지만은 않아서 계속 읽고만 싶었다. 기자라는 직업 때문일까? 간결한 표현은 어쩐지 단단한 돌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야기 속에 인용된 문장들 때문에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다.



▪️ 아버지의 부재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있음' 역시 나는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극복했다. 나는 엄마가 김애란 소설 속 '모'처럼 단단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냥 또 다른 엄마를 발명하면 어떨까 싶었다. 어떤 아이에게는 '두 명의 엄마'가 필요한 법이다. 엄마를 내가 선택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실재하는 엄마의 빈 부분을 메워 줄 가상의 엄마가 필요했다. <달려라, 아비>나 <칼자국> 속의 엄마 같은. | p.21

이 책에서 줄 긋고 싶은 문장은 아주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문장으로 꼽을만한 부분이 많지만 나는 이 문장을 읽다가 가만히 생각했다. '아버지'라는 단어와 '엄마'라는 단어를 서로 바꿔 읽으면 이것은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상처가 된 것은 엄마의 '부재'보다는 아빠의 '있음' 이었다. 저자는 극복했다지만 난 극복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자라면서 내가 그런 감정을 갖는 것에 대해 고통을 느꼈고 '없음'에 따라오는 그리움이나 허전함보다 '있음'이라는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단어도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매번 '있음'의 문제이지만 어쩐지 가족들은 내 '없음'을 채워주는 데 더 많은 힘을 들였다. '없음'은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있음'은 어떻게도 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저자처럼 나도 만화나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실재하는 아빠의 빈 부분을 메워 줄 가상의 아빠를 만들곤 했다. 어떤 아빠는 별로였지만 내 아빠보다는 나았고, 어떤 아빠는 너무 훌륭해서 현실 같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난 어떤 이야기를 읽어도 '엄마'에 관한 것보다는 '아빠'에 관한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갔다. 그렇지만 어떤 책도 내 마음을 완전히 표현해 주는 이야기는 없었다. 가장의 무게라는 것을 어깨에 짊어진 아빠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힘들게 일하는 아빠들, 자식이라면 끔찍한 다정한 아빠들. 그런 아빠는 내 세계에는 없었는데 그 '없음'보다는 그렇지 않은 아빠가 '있음'이 나는 항상 힘들었다.

개인적인 아픔, 육체의 병,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아픔의 장면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아름답게 쓰인 하나의 기사 같기도 하다. 알아야만 하는 것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생각해야 할 것들의 힘을 절실히 느끼게 만드는 글들은 단단하고도 다정해서 가끔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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