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순의 <자기 개발의 정석>을 읽고.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010
이 부장은 자신의 불행이 결핍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만성피로처럼 달라붙어 자신을 소모시키던 그 둔한 불행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결핍 탓이라 믿던 때는 달릴 수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p.59
대기업에 다니는 마흔여섯의 이 부장은 아내와 아이를 캐나다로 보낸 기러기 아빠다. 그저 그런 부부관계, 열심히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존재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 평생을 열심히 일해왔지만 모호한 미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현실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불행에 1을 주고 행복에 10을 준다면 대략 3.21 정도의 마음으로 정체 모를 허기를 참아내며 살아가는 이 부장에게 어느 날 만성 전립선염이 찾아오고 그 치료 과정에서 '아네로스'라는 걸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충만한 감각을 알게 되고 이 부장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얼핏 보면 이 책에는 전립선염, 아네로스, 자위, 오르가즘, 성기, 같은 단어밖에 안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헛웃음이 터지지도 하지만 결코 유쾌한 기분의 웃음은 아니다. 자조적이고도 씁쓸한 분위기가 이 책 전반에 깔려있다. 중년이 되어서야 우연히 알게 된 '감각'에 대해 그토록 집착적으로 탐닉한 이유는 그곳에 바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삶에서 자신은 분명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인생에 자신은 없었다. 자신의 몸이 직접적으로 느낀 통증과 황홀한 감각은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비존재'였던 이 부장이 비로소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결국 이 부장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찾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계속해서 탐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제라도 자신의 삶에서만큼은 살아있는 존재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안정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한 노력 위에 서 있는지를. 그리고 남편이 얼마나 주눅 든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아갈수록 실망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남편을 미워할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한 안정을 위해 남편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p.162
아... 내가 전립선염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는구나 하고 조금은 당황하던 중에도 중년 이 부장의 감정은 무척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몇몇 순간은 참 안쓰러웠다. 화자가 아내가 된 부분도 그랬다. 하지만 결말은 이 부장에게 너무 한 것 아닌가 싶다. 무척 자극적이어서 인상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부장의 이후의 삶은 어떡하냐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결말이다. 이 부장이 부디 잘 살아가기를. 비록 더욱더 씁쓸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