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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Jul 31. 2021

오르막길의 끝엔 결국 내리막길이 있다.

2일 차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남편은 아직도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고, 기특하게도 나는 그 우렁찬 소리에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잤다. 새벽잠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례자였지만 낯선 공간에서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 남편을 깨울 엄두도 내 몸을 일으켜 세울 용기도 나지 않았다. 무릎, 발목, 허리, 종아리, 허벅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40km를 걸은 이후의 여파는 꽤나 오래 지속될 것만 같았다. 걷는 행위는 아니 몸은 이토록 정직하다. 그냥 포기하자고 말할까 싶던 순간 남편이 귀신같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이야기했다. ‘오늘은 9km만 걷자. 지금 당장 출발하자!’ 어젯밤 내가 단잠에 빠져있는 동안 남편은 오늘의 동선과 중간 마을 그리고 숙소까지 미리 파악해둔 것이었다. 씻지도 먹지도 않은 채 눈을 비비며 얼떨결에 길을 따라나섰다. 몸의 상태를 살피다 보면 핑곗거리만 늘어날 뿐이니 일단 움직이고 보자는 계획이었다. 고백하건대 그의 명령조에 가까운 말투 덕분에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떠밀리듯 몸을 일으켜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첫째 날 이미 코스의 3분의 2를 걸었으므로 29km 중 남은 9km만 걸으면 된다. 우리가 머문 푸체키오(Fucecchio) 마을은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를 걷는 순례객들에게뿐만 아니라 로메오 스트라타(Romeo Strata)를 걷는 순례객들 에게도 로마로 가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 된다. 로메오 스트라타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출발하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알프스를 관통하여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유럽의 오래된 순례길이자 그 옛날에는 중요한 상업의 길이었다. ‘순례자’라고 불리는 우리 모두가 푸체키오를 거쳐 로마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순례길의 거점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마라톤 대회, 자전거대회에서도 지나갈 만큼 중요한 교차로의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하지만 기차역이나 제대로 된 숙박시설조차 갖춰져 있지 않아 관광객들은 구테여 찾아오지 않을 법한 느낌이었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수많은 소도시들을 여행했다고 자부했지만 걸으면서 만나는 마을들은 내가 감히 이 나라를 안다고 말하기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지명조차 낯선 경우가 많았다. 이탈리아 최대 내륙 습지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는 푸체키오도 마찬가지였다. 순례자가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이곳을 여행객으로 마주할 기회가 있었을까? 앞으로 거쳐 갈 낯선 소도시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푸체키오 마을의 중심에서 필요한 약품을 구매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남편은 첫날부터 양발에 물집이 잡혀 힘들어했지만 약사님이 추천해주신 습윤밴드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물집을 터뜨리지 않고 밴드를 붙이기만 해도 저절로 아물어 굳은살이 되기 때문에 걷는 여행자들에게는 필수품일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나도 군데군데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걷기에 무리가 없었고 무거운 다리는 아마 며칠만 지나면 근육이 붙어 걷기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핑계를 대지 않고 남편을 따라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9km라는 비교적 짧은 거리는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오늘은 쉬엄쉬엄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내 몸이 힘들 자연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기 때문이다. 다행히 산 미니아토 마을의 초입까지 길은 평탄했고, 내가 바라던 토스카나스러운 풍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사이프러스 나무, 파란 하늘에 걸린 하얀 구름. 드디어 처음으로 만난 반가운 순례자! 도시에서 아니 코로나의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 오롯이 대자연을 누리기 위해 떠나온 길이었지만 퍽이나 외롭던 참이었다.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우리보다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걸어갔지만 이틀을 연달아 마주쳤고, 감바씨 떼르메(Gambassi Terme)에서는 같은 숙소에 머물며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스베아(Svea), 독일 사람이지만 스위스의 은행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1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자 집에서 벗어날 이유가 무척이나 필요했고 마침 같은 시기에 우리를 만난 것이다. 걸으면서 만난 몇 안 되는 순례자들의 국적이나 나이는 모두 달랐지만 떠나온 이유는 비슷했으리라.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짐작해 보았다.      


논밭을 끊임없이 걷다 보니 ‘낮다’라는 뜻을 가진 산 미니아토 바쏘(San Miniato Basso) 마을의 표지판과 함께 주거 지역이 나타났다. 지도상으로는 바쏘 마을부터 우리의 목적지인 산 미니아토 까지 오르막길이 이어진다고 하여 마침 조금 쉬어가고 싶던 참이었다. 잠시 앉을 곳이 없을까 살피던 중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과 시원한 물, 간식까지 제공하는 간이 휴게소를 발견했다. 자원봉사자 분들께서 순례객을 위해 매일 물과 간식을 채워주시는 곳이라고 했다. 직접 감사를 전하고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비상 연락처만 있을 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방명록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면서 가슴이 조금 뻐근해졌다. 불특정 다수를 위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의를 베푸는 마음이 고마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에 직업을 잃었다고 타인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아등바등 해왔던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받는 만큼은 나누는 사람이 되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나누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조차 나는 받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저 묵묵히 걷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보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화한 마을을 지나자 말 그대로 극한의 오르막길이 이어졌는데 내 시야보다 한참 위에서 손을 뻗어도 도저히 잡히지 않을 듯한 목적지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허벅지에는 불이 났고, 땀은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얄미워 멈춰서 노려보다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태워달라고 애원할까 고민하기를 반복했다. ‘거의 다 와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남편의 구호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을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첫째 날의 40km에 비하면 짧은 거리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우리가 걷는 길에는 매일 색다른 어려움이 존재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다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눈앞에는 목적지가 있고, 그 끝엔 결국 내리막길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포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트러플 파스타를 한 접시씩 먹어 치웠다. 산 미니아토 마을은 세계 3대 진미라 불리는 트러플 생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에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꼭 가보자고 미리 점찍어둔 식당이 있었다. 남편은 20일 여정을 통틀어 그날 먹었던 음식이 최고였다고 회상한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는 물음에는 매일 답이 바뀌면서 음식만큼은 한결같은 것을 보면 퍽 진심인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는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자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온 만큼 멋진 뷰가 보이는 창가에서 붉은 햇살이 저무는 내일의 내리막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래, 내일은 내리막길이다! 붉은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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