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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Jul 16. 2021

길 위에서 배운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

1일 차,루카(Lucca)-푸체키오(Fucecchio)-40km

맙소사! 목표한 200km 중 5분의 1을 첫째 날 다 걸어버렸고, 우리는 그날 밤 장렬히 전사했다. 




걷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큰소리를 뻥뻥 치던 남편은 첫째 날 40km를 걷고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물론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제와 전혀 다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그렇지! 절대 만만한 길이 아니라니까!’



우리가 계획한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토스카나 구간은 28번부터 36번까지 총 220km를 9일에 걸쳐 하루 평균 25km를 걸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가장 짧은 구간은 13km, 가장 긴 구간은 31km로 내가 원하는 만큼 더 걷거나 덜 걸을 수 있지만 웬만하면 공식 루트를 따를 것을 추천한다. 책자와 공식 홈페이지에는 구간별로 순례자를 위한 숙소와 난이도가 잘 표시되어 있는데 첫날부터 욕심을 부려 우리가 호되게 당했다. 나는 오른쪽 무릎에 무리가 왔고 남편은 양발에 물집이 잡혀 한 발짝 내딛기조차 어려웠으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끝까지 걸어 내기는 했지만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진리를 길 위에서 깨달았다. 



28번 구간 

루카(Lucca)-알토파쇼(Altopascio)-19km


다행히 구름이 잔뜩 낀 날씨라 걷기에는 수월하겠구나 싶었다. 떠나기 전 루카 두오모 앞에서 앞으로 우리의 길을 잘 보살펴 달라고 기도를 했다. 500ml 생수 네 병의 무게가 더해져 가방은 더 무겁게 느껴졌지만 늘 그렇듯 기도를 하면 내 기도를 들은 누군가가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아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도심을 빠져나가자 현지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주거 지역이 한 시간쯤 이어졌다. 깨끗하게 포장되어있는 아스팔트 도로 양옆으로는 논밭과 집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토스카나 하면 떠오르는 그 사이프러스 나무가 없어 실망하기도 했지만 처음 만나는 신기한 작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카르초피(Carciofi,아티초크라고도 부름)와 보라색 꽃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나는 늘 먹기만 했지 이렇게 자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너도 이렇게 있는 힘껏 어여쁜 꽃을 피워내는구나. 그리고 꽉 찬 열매를 내어주었구나. 살랑살랑 긴 목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들꽃들 보다 왠지 모르게 카르초피 꽃에 더 눈길이 갔다. 매번 먹을 때마다 알맹이만 크고 정작 먹을 것은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던 나였지만 이제 카르초피를 보면 성지순례길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혹시 길을 잘못 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도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표지판이 눈에 띄게 설치되어 있어 지도나 애플리케이션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우리의 배낭을 보고 순례자들을 향한 인사와 응원인 부온 깜미노(Buon Cammino, 좋은 길 되세요)라고 인사를 해주어서 우리가 진짜 시작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길이 비교적 평탄했던 덕분인지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점심시간 무렵 이미 첫 번째 목적지인 알토파쇼에 도착했다. 19km를 반나절 만에 걸은 것이다.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없어 당일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알토파쇼 마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걸을 수 있겠다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점심 식사만 간단히 해결한 뒤 다시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책자를 미리 꼼꼼히 살펴보았다면 겁 없이 달려들지 않고 그날의 일정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29번 구간

알토파쇼-푸체키오-산미니아토(San Miniato)-29km


알토파쇼 이후에는 거대한 숲을 두 번이나 거쳐야 했다. 구글 지도를 켜보았지만 거리도 우리가 거쳐야 하는 숲도 도저히 가늠이 안되었기 때문에 일단 가는데 까지 가보자 생각한 것이 큰 실수였다. 출발 이후 40km 지점인 푸체키오 마을까지 숙소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하루 동안 40km를 걸어야 한다고? 이미 되돌아가기엔 늦었고, 첫날부터 버스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길에서 잘 수도 없으니 유일한 방법은 걷는 것밖에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당일 숙소 예약을 했다. 코로나의 상황으로 작은 마을에 거의 유일에 가까운 호텔이었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다. 그마저도 놓치게 될까 봐 그제야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때 우리는 이미 땅바닥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상태라 앞으로 남은 10km를 걸어낼 수 있을지 불확실했지만 반드시 걸어야만 했다. 버스도 택시도 심지어는 걷는 사람조차 없는 거대한 숲 속이었으니 말이다. 상쾌하던 숲의 내음이 습하고 축축해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나무 때문에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고 싶어 졌다.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힘들어지자 자연이 그 어떤 위로도 주지 못했다. 기록 중독자인 우리 부부가 사진도 영상도 그 어떤 것으로도 기록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겨우 숲을 빠져나오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나보다 더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부정적인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끝까지 걸어주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가 도저히 못 가겠다고 주저앉기를 반복하다 보니 저녁 8시 30분이 되어서야 푸체키오 숙소에 도착했다. 

꼬박 13시간을 넘게 걸은 것이다. 



‘살았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여보 수고했어.’ 하며 서로를 꼭 껴안아 주었다. 둘 중 한 명이 “네가 먼저 걷자고 했잖아” 로 시작해 싸움으로 번지면 일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부부의 내공이었다.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든 밤이었지만 고생한 내 몸을 생각해서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숙소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청결하지 않았고, 저녁 늦게까지 시끄러웠지만 맛있는 포르치니 파스타 한 접시에 용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숙소마저 없었다면 진짜 포기해야 할 순간이 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금의 감사한 마음도 있다.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 무릎아, 발바닥아..’ 

우리는 앓는 소리를 하다가 그 모습이 우스워 키득키득 웃다가 이내 곯아떨어져 버렸다. 


욕심을 버리고 길 위에서 위로를 받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지나온 길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아니 부끄러워졌다. 과유불급, 지나침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전진할 것,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걸어온 길에 대한 결과를 감내할 것. 절제는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도 내가 풀어내야 할 숙제인 것만 같았다. 






40km를 걸은 날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aG5vwY_jsmU&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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