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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Jul 02. 2021

두려움의 끝에서 로마를 만나다

이탈리아 성지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2021년 6월 1일 결단을 하고 6월 4일에 떠났다. 그리곤 400km를 걸어 로마를 만났다.

코로나 백수가 된지 1년하고도 3개월, 주머니는 솜털처럼 가벼워졌고, 머릿속은 하지 않아도 될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차 늘어진 몸뚱아리처럼 무거워 졌다. 일상은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지 그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누군가 떡하니 해답을 내려주길 바랬지만 그럴리는 만무하고 그저 살아지는 대로 하루하루를 버티기만 할 뿐이었다. 백수생활 1년까지는 인생에 언제 가져볼 긴 휴가겠나 싶어 긍정의 회로를 돌리며 잘 이겨내고 있는 척을 했다. 하지만 노는것도 하루 이틀이지 1년이 지나자 마치 오랜 장마로 비에 젖은 채 축축 늘어져 있지만 한 줌의 햇살도 내려쬐지 않는 습하고 어두운 일상이 반복되며 두려움마저 엄습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서로에게도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부부 사이에 아슬아슬 생채기를 내는 날도 잦아졌다.       



 이대로는 더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남편이 먼저 이탈리아 성지순례길 이야기를 꺼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전환점에서 성지순례길을 찾는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약했던 스스로를 이겨내고 길 위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 보자고, 그 길을 걷고 나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수많은 순례자 선배들의 말을 믿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남편은 영국 켄터베리에서 출발하는 총 길이 2000km에 달하는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라는 순례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토스카나 구간 딱 200km만 걷고 오자고 제안을 했고, 나는 덥석 물었다. 6월의 토스카나라니 ! 걸어야 한다는 걱정 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코로나 시대를 그리고 우리의 상처를 위로 받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백수가 된 이후 아니 그전에도 하루 10km를 마음 먹고 걸어본 적이 없는 우리였다. 남편은 십수년 전 군대 행군 때 50km를 걸어봤다며 으스댔다. 그때 몸과 지금 몸이 같을 리 만무하지만 그런 남편을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200km냐 구시렁 잔소리를 해 댔겠지만 이번만큼은 군말 없이 따르고 싶었다. 아니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답이 없는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새로 채우기 위해서는 온전히 비워내야만 했고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 아무런 준비도 사전 정보도 없이 10kg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순례길 여정을 시작했다. 떠나기 전에는 기초체력 단련보다도 기도를 참 열심히도 했던 것 같다. 엄마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처럼 하늘에 대고 무작정 기도 했다.      


‘-제발 포기하지 않게 해주세요.’      


생각해보면 그 어설픈 기도의 힘 덕분에 400km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절대 우리의 힘만으로는 해내지 못했을 무수한 위협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먼저 제안은 했지만 첫날의 코스 19km를 완주하면서 나는 알았다. 20여일 뒤에 우리는 분명히 200km를 더 걸어 로마 바티칸에 도착해 있을 것 이라는 것을.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다 보니 내가 했던 수많은 생각들은 사실은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이거나 걱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하루만에 깨달았다. 잡생각이 사라지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하루 종일 들여다보던 SNS도 멀리할 수 있었다. 걸으면서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을 마주하며 얻는 에너지가 신선했고, 햇살도 공기도 다양한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반나절만 뙤약볕에서 걷고 나면 저녁엔 맛있는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이란 ! 천국이 있다면 이런 맛이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뜨거운 태양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풀독이 올라 고생을 하고 물집 때문에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모든 상처들은 이내 아물었고 더 단단해졌다. 내 예상대로 토스카나 구간을 마무리 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다음 숙소를 예약하고 다시 걸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걷는 동안 우리의 걱정은 오로지 내일의 잠자리 뿐이었다. 그 얼마나 단순한 삶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걷고, 때가 되면 먹고 잠을 자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걸음을 멈춰 긴 숨을 몰아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진짜 로마 바티칸에 도착해 있었다. 억지로 내딛은 발걸음이 아니라 몸보다 마음이 먼저 로마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꿈꾸던 목적지 바티칸에 도착했다. 차로는 3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을 20일을 걸어 도착하자 순례자인줄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환호해 주었다. 감격스러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쉬움이 더 컸다. 이제 끝이라니. 격렬하게 또 걷고 싶어져서 울컥했다. 순례길 선배들이 했던 말처럼 이제 나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가 않고 못할 것이 없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엄살은 조금 부렸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길을 걸은 후에 느낀 신체의 변화는 늘어져 있던 몸에 바짝 긴장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리에는 단단한 근육도 생긴 것 같아 계속 찔러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를 시전해가며 모든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던 내가 ‘감사합니다.’를 먼저 내뱉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안전하게 도착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걷는 도중에 비를 만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튼튼한 두 다리로 내 의지로 온전히 걷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베드로 성당에서 감사를 줄줄이 나열하는 기도를 드리고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반나절 짧은 로마에서의 휴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콤한 꿈에서 깨기 싫어 억지로 잠을 청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볼까 싶은 일을 가장 풍요롭게 경험해 나아가고 있구나. 멈춰있는 시기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아마도 다음 배낭을 꾸리고 있겠지.


이태리부부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5h87rVd5j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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