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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Mar 29. 2022

이탈리아에서도 세입자는 서럽다

나의 여섯 번째 집에게

  

 

이탈리아에 온 지 만으로 7년을 꽉 채워가고 있다. 
허울좋은 유럽에서 세입자로서의 서러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나는 꽉 찬 7년을 이곳에서 사는 동안 다섯 번의 방과 집을 떠돌았고 이제는 여섯 번째 집을 찾아 나설 차례이다. 나에게 집이란 어떤 것일까? 언제 어디로 떠나도 편하게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내 집이어야 했으나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는 곳이 되었다. 이제 좀 적응했다 싶으면 쫓기듯 떠밀리고, 부유하듯 세입자로서의 설움을 담뿍 느끼며 살았다. 덕분에 물건을 늘이지 않는 것에 혈안이 된 삶이기도 했다.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내 물건들이 편히 자리 잡는 공간. 내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의 첫 번째 집은 


로마의 5층짜리 빌라였는데, 방 세 칸 화장실 한 칸 있는 집에서 가장 큰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작은 발코니가 도로를 향하고 있어 시끄러웠지만 핫한 식당과 펍이 많아서 젊음의 열기가 활기찼고, 해가 잘 드는 따뜻한 집이었다. 나머지 두 칸의 방에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침대 여럿을 놓고 살았는데 최소 3명에서 6명까지 수시로 입주자가 바뀌며 먹고 자고 했다. 독특한 향신료 냄새가 항상 집에 가득했고, 나에게 음식이라도 권하는 날이면 거절을 하지 못해 그들처럼 손으로 음식을 받아먹고는 했다. 그 집에서 9개월을 사는 동안 나는 물을 끓일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주방을 써 본 적이 없었고, 화장실도 마음 편히 갈 수 없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 삶이 좋았다. 그마저도 내가 그토록 듣기 싫던 ‘청춘’이라는 단어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살고 싶은 집이었으나 이사를 결심한 계기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 때문이었다. 나만 해가 잘 드는 발코니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동네 길 잃은 비둘기들도 내 발코니를 좋아했다. 온갖 배설을 하고 알을 낳고 심지어 그 알에서 새끼까지 태어나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밤마다 그들은 짝짓기 해댔고 나는 똥을 치웠다. 커뮤니티를 통해 알아본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실제 집 사진과 다릅니다. 


나의 두 번째 집은 


이탈리아에서 보기 힘든 아파트 형식의 거대한 빌라였는데 내 방은 0층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지하철역과 가까웠고, 한국 사람과 살 수 있으니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로마의 유명한 음악 대학의 성악 공부를 하는 친구였다. 그녀는 집에서 시시때때로 노래를 불렀으나 집에서 아리아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우리는 된장찌개와 떡볶이를 마음껏 해 먹으며 유럽에서 한국의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나 여전히 단점은 존재하는 법. 창문을 열면 바로 복도와 마주하고 있어 문을 열 수 없었고 햇빛 한 점 볼 수 없는 집이었다. 게다가 집주인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한 달에 한 번씩 그것도 나폴리에서 로마까지 집 검사를 하러 와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결혼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집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는 6개월도 채 살지 못했다.      



나의 세 번째 집은 


 무수히 떠돌던 방 한 칸이 아니라 남편과 오붓이 함께할 첫 번째 집이었다. 아담한 크기였지만 넓은 발코니가 있어서 가지, 토마토, 깻잎, 부추를 길러 먹는 작은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이 집의 가장 큰 단점은 위치였다. 로마 A 선 끄트머리 바티스티니(Battistini) 역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은 들어가야 우리 집이 나왔다. 버스는 30분에 한 대씩 온다는데 한 번도 제때 온 적이 없었고, 그 시간을 기다리느니 나는 늘 30분씩 걷는 쪽을 택했다. 로마에 살았는데도 로마 시내 중심까지 가려면 못해도 한 시간을 걸리는 위치였다. 여름에는 지긋지긋하게 더웠고 겨울에는 실내에서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릴 정도로 추웠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결심했다. 이번에는 좀 먼 곳으로     


나의 네 번째 집은 


이제부터는 로마가 아니라 베네치아에서의 삶이다. 메스트레 기차역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집이었으며 남향으로 커다란 발코니가 두 개나 있었다. 복층 구조라서 로망 실현에도 적합한 구조였다. 부동산을 통해 집을 구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치사했으며, 돈도 많이 들었지만 제법 마음에 들어 오랫동안 살고 싶었던 집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70년 이상 오래된 집이고,  공과금과 에너지 사용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부과되어 매달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우리 집을 참 좋아하고 애지중지 닦고 쓸며 살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입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집주인 남자의 외도로 그것도 20살 이상 어린 독일 여자와 사랑에 빠져 둘이 함께 살 집이 필요하니 집을 비워달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2년을 채 살지 못하고 그 집을 나와야만 했다.      



나의 다섯 번째 집은 


2020년 3월 이탈리아가 코로나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봉쇄라는 초강수를 두려던 때 급작스럽게 들어오게 된 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3월 10일 이사를 하고 3월 12일부터 약 두 달 동안 봉쇄정책에 돌입해 꼼짝없이 집에만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사업가였던 집주인은 봉쇄 해제 이후 코로나가 장기화할 것을 알아채고 우리가 사는 집을 판매하기로 했다고 통보해 왔다. 입주 후 3개월 만이었다. 이제는 나가 달라는 통보가 놀랍지도 않다. 합법적인 서류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또다시 이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집은 지어진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새집에 바닥난방이 되고 에너지 효율이 높았다. 그러나 정사각형 모양이 아니라 한 건물에 억지로 한 집을 더 집어넣기 위해 끼워 맞춰 지은 집이라 2년 동안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입자임과 동시에 '을'인 우리는 집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깨끗한 상태의 집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매주 쓸고 닦느라 허리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보다도 코로나 시기에 낯선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내 사생활을 보고 간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그만 떠돌아야겠다고.      



사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빌려 살아야지 무슨 뾰족한 수는 없다. 그저 꼴도 보기 싫은 집주인이 다녀간 어느 날, 남의 것을 쓸고 닦으며 최대한 상냥하게 웃고 있던 내가 안쓰러워 이 글을 쓴다. 








덧, 드디어 기나긴 집 전쟁이 끝났습니다. 아니 끝이 아니라 더 연장해서 살 수 있게 되었어요. 2년 동안 집이 팔리지 않자 집주인은 집을 파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이탈리아가 집매매가 참 쉽지 않은듯 해요.)앞으로 원하는 만큼 이 집에서 더 살아도 좋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집 때문에 정말이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2년 이상 거주하는 집은 이 집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집복도, 집주인 복도 없다고 얼마나 눈물 콧물을 짰는지 몰라요. 이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신경이 쓰이는 일인지, 다시는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 집을 보여주려는 부동산이 없으므로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부터 머리를 조아려야 하며, 전기, 가스, 각종 공과금, 인터넷 해지와 새로 신청하는 일까지 족히 2-3달은 걸릴 만큼 느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해외 생활이 절대 쉽지 않음을 이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많이 징징댔는데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기도 하지만 2년 동안 실랑이를 하느라 사실 이 집에는 오만정이 다 떨어졌어요.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고, 다시 수입이 생기기 시작하면 새로운 집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나의 여섯번째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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