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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뻬드로 Jul 24. 2020

글쓰는 도련님과 칼

사물 에세이 #10

어제 저녁 이야기입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퇴근길 저녁. 바짓 가랑이가 좀 젖어도 괜찮죠. 마침 마눌님이 사 준 올 플라스틱 재질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었으니 찰방찰방 인도를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녁엔 떼우지 말고 모처럼 쌀밥을 먹어보자

혼자 저녁밥을 먹어야겠기에 한솥도시락 가게에 들렀습니다. 몇 년만이었죠. 무인 키오스크 주문기계가 서있더라고요. 약간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맥도날드에서 하듯이) 삑삑 잘도 선택했습니다. 그중에 역시 추억의 메뉴 도련님도시락이 눈에 들어왔기에 주문바구니에 넣고 카드를 꽂아 결제를 했습니다. 포장이 되는 동안 눈을 돌려 보니 매장의 몇 안되는 테이블은 고딩들로 보이는 교복보이들로 가득차있었고 작은 컵라면과 도시락을 금방도 해치우고 학원들로 총총 사라졌습니다. 저의 밥이 나올 때까지 비옷을 입은 배달원도 두 명이나 배송을 나갔고요. 원어민 선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 명 또 포장 도시락을 기다리고 있는 아주 생경한 풍경 속에 서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도련님 도시락을 먹으며 도련님 행세를 해보겠다는 상상을 하며. 



이리 오너라

도시락이 든 비닐봉지를 우산 손잡이에 걸고 집에 도착해서 혼자앉은 식탁에서 엣헴! 하며 느긋하게 우아하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숭늉 좀 가져오너라' 해봤자 아무런 대답이 없기에 시원한 생수를 한 잔 따라 마셨습니다. 모처럼 조용한 집에서 식사를 잘 마치고 나니 기분이 좋았죠. 도련님 도시락인데 '고기고기'라 제육볶음, 소불고기도 들어가 있는 메뉴였기에 (40대가 되어 벌어지고 잇몸이 낮아지기 시작한) 치아 사이에 끼기 십상이라는 걸 이미 알았죠. 이쑤시개가 필요했습니다. 



칼을 들 명분이 되겠느냐

식사를 마쳤으니 나무젓가락이 눈앞에 있고 아웃도어용 다목적 툴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캠핑 때 가끔 사용하는 맥가이버 칼 같은 도구인데요. 가장 쓸만한 공구가 어느 부분일지는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칼이죠. 가끔씩 날카롭게 갈아놓고 전체를 WD40 윤활방청제를 뿌려 녹슬지 않게 관리하던 것입니다. 칼을 쓰는 방법은 너무나 상식적이죠. 칼날을 몸과 반대방향을 향하도록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안되고 위험할 수도 있는데...

역시 피를 보았습니다. 나무젓가락을 장작쪼개기 하듯 하려다가 어긋나서 아랫쪽에서 젓가락을 잡고 있던 왼손 검지를 베었습니다. 피가 많이 났고 휴지로 닦으려 했지만 너무 많이 났습니다. 세면대에서 닦은 다음에 싸매어 보려했는데 피가 나는 모양새가 조금 벤 게 아니었죠. 주변에 밴드에이드가 없어서 휴지로 둘둘 감은 뒤 도시락 고정용 고무밴드로 감아 지혈을 했습니다. 



글을 쓰자. 칼을 쓰지 말고.

손가락 아프다는 핑계로 글쓰기도 건너 뛰었습니다. 다행히 피는 멈췄고 잘 잤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야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 사면서 대일밴드 사서 감았네요. 글을 못 써서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밴드 감은 손으로 글을 씁니다. 도련님이 어설프게 칼을 들면 자신을 벨 수도 있겠습니다. 칼을 제대로 썼다면 문인이 아니라 무인이었거나 장인이었겠죠. 잔기술과 잔꾀를 좋아하며 살아온 저로서는 (몸이 마음같지 않은 나이가 되어가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글쓰기 기술을 연마하는데에 더 힘을 쏟아야겠다, 칼날을 연마하는 건 좀 뒤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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