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예감을 배신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망각하기 때문에 행복한 존재라고 한다. 만약 뇌가 컴퓨터처럼 모든 경험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 있었던 슬픔과 두려움, 부끄러운 감정들이 계속해서 누적되어 점점 더 커다란 괴로움으로만 다가올 뿐, 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치유하는 데 있어 시간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극복할 수 있고, 지옥과도 같았던 군 복무 시절조차 '나름 괜찮은 추억'으로 보정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자기치유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망각과 보정의 작용이 지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뇌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월이라는 '약'에는 가공할만한 치유 능력 이면에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존재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세월의 부작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렸을 적의 친구들과 추억을 나누다 보면 적지 않은 지점에서 핀트가 어긋난다는 점에 놀라기도 한다. 분명 같이 겪은 일이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한데 내 친구가 나와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친구가 나보다 모자라기 때문인가? 그러나 달리 기록을 해두지도 않았기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증명할 방법은 없으며, 결국 기억의 간격은 메워지지 않은 채로 꺼림칙한 느낌을 남겨두게 될 때가 많다. 이것은 두 사람이 오랜 시간 각자의 영역에서 살며 추억을 공유하지 않게 되면서 벌어지게 된 시간 동안 뇌가 장난질을 친 결과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맞을 수도 있고, 두 사람 모두 틀렸을 수도 있다. 뇌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란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난해하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얼핏 가닥을 잡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것은 이 책이 철저하게 1인칭으로 쓰인 독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독자로서의 객관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소설들이 1인칭으로 쓰였으나 대부분 형식에 불과할 뿐, 결국 작가들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주변 상황에 대한 해설을 '객관적'으로 완성하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의 전반부를 담당하는 토니의 회상은 우리의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흐릿하고 보정된 기억이며,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후반부 토니의 생각과 판단은 어느 것 하나도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토니가 기억하는 그의 어린 시절은 진실이 아니다. 그가 판단하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입장과 생각은 더더욱 진실에서 거리가 멀다. 오랜 기간 치밀하게 다듬어진 추억 보정은 그의 과거를 입맛에 꼭 맞도록 아름답게 포장해버렸다. 에이드리언은 그가 기억하는 만큼 똑똑하고 냉소적인 인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베로니카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평범하고 특징 없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토니의 회상에서 명백한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이러한 토니의 성정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허세 많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치기와 열등하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 어쩌면 그것들이 토니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의 과거를 미화하고 바꿔버렸을 것이다. 가족도 결혼도, 모든 것이 체제의 구속이라고만 느끼는 토니와 친구들은 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불순응의 매력과 쾌감에만 몰두한다. 이들이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특별한 소설의 특별한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에이드리언의 어머니가 멋대로 애인이 있을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 후보로 만들어놓고 차라리 가족은 없는 것이 행복하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린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은 이미 기억의 위험성에 대해 통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매일 조금씩 미화되어 진실이 점점 사라지는 자신의 머릿속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평범함조차 갖추지 못한 채 교사의 발언을 카피하는데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던 토니의 열등감은 베로니카와의 만남으로 심화되었다. 토니는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예측하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에 에이드리언의 자살도, 베로니카와의 실연도 그를 상처 입히기 전에 이미 그의 입맛대로 규정되어 버렸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는 모든 회상이 '진실이 아니다'라는 점을 최대한 잊고 토니의 주관에 몰입해야만 한다. 소설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그의 과거 행적을 토니만큼이나 모두 사실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착각'을 기반으로 주위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판단하는 토니의 '예감'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우선 한 번의 정독으로 토니의 회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배신감을 느끼고 나서야 가능하다. 에이드리언은 왜 자살했을까. 베로니카는 왜 자신과 헤어졌으며, 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까.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왜 내게 다이어리를 남겼을까. 에이드리언의 다이어리에는 과연 무엇이 쓰여있을까. 작가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으며, 정해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토니는 이 모든 것을 '이제는 알겠다'는 말로 자신의 독백을 마친다.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지금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버린 기억이다. 토니는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역사의 승리자는 살아남은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기억하는 한 자신들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승리자이다. 그리고 그런 과거를 미화하며 거짓말이라는 승자의 특권을 맘껏 누린다. 토니는 살아남은 '승자'로서, 그의 과거에 대해 그러한 특권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결국 베로니카의 말처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한 발짝도 발전하지 못하는 토니는 마지막까지 변한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