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사회적으로 아이돌 가수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짐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보이/걸그룹의 주류 연령대가 초등학생으로까지 내려가지는 않은 것을 보니 우리 사회가 아직은 내 기준에 '정상'의 범주 내에는 위치하는가 보다. 아주 가끔씩 초등학생이 아이돌로 데뷔하는 장면을 봤던 것도 같은데, 소위 '삼촌팬'을 양성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이돌이라는 게 비록 가수라고 분류되기는 하지만 컨셉을 테마로 하는 퍼포먼스가 위주인 '대중적 상품'이기 때문에,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아이돌 시장에 지나치게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것은 아직 거부감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돌 문화의 본원인 옆 나라 일본의 아이돌 시장이 이미 '합법적 롤리타 컴플렉스의 발산지'가 되어버린 상황을 보면, 단순히 '우리나라 좋은 나라'로 안심하고 있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인지도 모른다.
비록 어린아이에 대한 상품화에는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조금은 편하지만 그래도 이런 부류의 글을 쓸 때는 아직은 조심스럽다. '좋은 것', '정상' 등의 가치판단에 이용되는 단어들을 과연 개인의 취향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으로 번질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일반적인 시각'에 '가치판단'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는 자체에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윤리적으로 명백한(것으로 사회가 판단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질수록 소수에 대한 배려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마련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특히 성 문제에 대한 소수의 의견이 탄력을 받고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당당히 드러내고 '다름'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 소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권을 무기로 차츰 그들의 '다름'을 양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는 반면, 성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로 분류되는 극단들은 여전히 비정상의 영역에 머물러있다. 소아성애를 비롯하여 그만큼이나 혐오스러운 눈길을 피할 수 없는 각종 '성애자'들은 성 소수자라는 타이틀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범죄자로 취급받는다.
성 소수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집단주의의 배타적 성질에 있다. 물론 집단이란 현재 우리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테두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 좁은 땅 안에서도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일반적인 것의 기준은 변해왔었다. 그런데 과거에는 오늘날 기준으로 '소아'에 불과한 나이의 소녀가 혼인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반면에,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회에서도 그것을 일반적 현상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동성애를 일반적인 것이라고 점점 인정하면서도 소아성애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로 치부한다. 무엇이 다른가?
소아성애를 거부하는 인식은 대체로 소아성애가 곧 범죄를 유발한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폭력으로 연결될 여지는 적기 때문에 동성애는 여전히 취향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소아성애는 연약한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과 강제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성적 취향이 범죄로의 연결을 반드시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소아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라는 점에서, 소아성애는 아직 범죄라는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점에 대해 험버트의 다음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깊다.
나는 미성년자의 정조를 더럽히지 않으면서 꿀맛처럼 다디단 쾌감을 몰래 맛본 것이다. 그녀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마술사가 젊은 여자의 새하얀 새 핸드백 속에 우유와 벌꿀과 부글거리는 샴페인을 마구 쏟아부었는데, 보라, 핸드백은 멀쩡하다. 그렇게 나는 내 비열하고 열렬하고 사악한 꿈을 교묘하게 실현시켰다. 그러나 롤리타는 여전히 무사하고 나도 무사하다.
이 문장은 소아성애가 곧 범죄를 유발한다는 사회적 인식에 대해 적절한 변호로서 기능하고 있는가? 여기서 험버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사하다'는 표현이다. 물론 험버트의 생각대로 롤리타가 그의 교묘한 행위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가정 하에서 분명히 험버트의 행위는 범죄는 아니다. 따라서 성 소수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펼치는 '남한테 피해 주는 거 없다'는 논리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험버트는 그의 성향이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충동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만의 '일탈' 행위를 저지르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우리는 색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능한 군인들과 달리 강간을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행하지만 온순하고 신사적이며 강아지처럼 착한 눈매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력을 지녔지만 님펫을 한 번 만져볼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몇 년이나 몇십 년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험버트가 토해내는 한탄의 핵심은 단순 명료하다. "나로서 어쩌라는 말인가?" 타고난 성향에 따라 움직이는 감정은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컨트롤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미 이성으로 행동을 충분히 억누르고 있는데, 감정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는 말이다. 여기서 험버트가 가진 비정상적 '취향'은, 그가 저지른 범죄와는 구분되어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폭행은 두말할 것 없이 악질적인 범죄 행위이며, 특히 그 대상이 아동인 경우는 차마 언급조차 불쾌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행위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아동에게 성욕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가지는 감정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소아성애자에게 아동을 보고 욕정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 것은, 동성애자에게 억지로 이성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험버트는 회고를 통해 그녀를 범한 것을 더없이 후회한다고 밝히며,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롤리타, 쓸데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꼭 말해야겠다. 인생은 아주 짧아. 여기서부터 너도 잘 아는 그 고물차까지 스무 걸음, 많아봤자 스물다섯 걸음이면 충분해. 아주 짧은 거리야. 그 스물다섯 걸음을 걷자. 지금. 지금 장당. 지금 그대로 떠나면 돼. 그때부터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거야."
소설의 결말이 주는 한 가지 희망은 험버트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그가 더 이상 님펫이 아니게 되어버린 롤리타에게 여전히 집착하는 모습은 그의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주장에 힘을 더해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비록 25세나 되지만, 롤리타에게 님펫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시기까지 험버트가 생존해 있기에는 충분하다. 곧 롤리타에게 제안했던 '영원'은 롤리타가 님펫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느끼는 험버트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험버트는 자신의 성향이 악으로 발현된 퀼티라는 인물을 처단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하고 자신의 비정상을 봉인 내지는 극복하려 하였던 것일지 모른다. 다만 그가 퀼티를 처단하는 감정이 롤리타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망쳐버린 자에 대해 갖는 복수심인지 아니면 롤리타의 마음을 빼앗아간 자에 대한 질투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험버트는 롤리타가 떠난 후 비교적 정상적인 나이 차의 연인을 '자발적으로' 만났고, 롤리타 이후에 비록 눈길을 줄지언정 님펫으로부터 적극적인 욕정을 표현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죽음이 두려운 건 완전히 혼자가 되기 때문이야."
그러나 다분히 비극적인 점은 롤리타가 온전히 두 비정상적 성애자의 탐욕으로 인해 성장기를 망쳐버린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비록 그녀가 험버트에게 자발적으로 애인 관계를 허락하였다고 하더라도 험버트가 비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그가 그녀의 학교생활에서 드러나듯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게 된 주범이기 때문이다. 롤리타의 성장기는 그녀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고, 제멋대로이면서도 의존적인 성격으로 만들어버렸다.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롤리타는 구원자가 나타날 때까지 험버트를 떠날 용기가 없었으며, 그녀가 그렇게 된 책임에서도 험버트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소설은 소아성애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애환과 세상과 타협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것이 감히 행동으로 실현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들을 성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잠재적 성범죄자와 실현될 수 없는 사랑에 애끓는 불행아 사이에서, 험버트와 롤리타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성 소수자를 대하는 오늘날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평점 ★★★★☆
reviewed by lk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