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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잌쿤 Sep 30. 2017

죽음의 수용소에서 태어난 숭고함의 철학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몇 년 전에는 마치 그것이 시대를 살아가는 의무인 양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종용하더니 이제는 꿈이 없어도 괜찮다는 위로 투성이를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바쁘다. 허황된 소리 들어줄 여유가 없었던 청년 세대들의 반발심에 놀란 탓일까.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기라도 하듯 희망을 노래했던 이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깊어져 가는 청년들의 '헬조선' 타령에 이제는 '무의미함의 미학'으로 마케팅 전략을 바꿨다.

삶이 꼭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다며, 그냥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큰 욕심 없는 삶이 오히려 행복에 가깝다고 청년들의 귓가에 감언이설을 펼친다. 부도 명예도 건강도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 무의미한 삶으로의 유도가 감언이설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다. 



이러한 희망 마케팅과 反희망 마케팅은 전혀 상반된 주장인 것 같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같다. 청년 세대를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기성세대의 체제 안정 전략이 그것이다. 전에는 강퍅한 수준에서 머무르던 사회 부정적 인식에 대해 더 열심히 살면 나아질 수 있다 하여 청년들을 억지로 양지로 끌어오려 했다면, 이제는 '헬' 수준까지 떨어져 사회 혐오로 발전해버린 청년들의 인식에 대응하기 위해 음지에 있어도 괜찮다고 위로하며 청년들이 지금보다 더욱 무기력에 빠지는 일이나마 막아보려 지금 수준으로라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자신들의 위기의식을 표출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 사람들이 잔머리를 잠시 쉬면서 프랭클의 책을 들고 로고테라피 기법을 조금 공부해보면 어떨까. 그들의 시선을 체제의 안정에서 벗어나 청년들의 삶 자체로 조금만 초점을 돌려보면 어떨까. 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청년들이 각박한 세상을 왜 견뎌야 하는지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던져보도록 하면 조금은 반발심을 줄이고 미약한 공감이나마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깨어지지 않는 바위와도 같이 느끼며,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과 역겨운 사회 밑바닥 이면에 신음과 한탄을 토해내고, 더 이상 지쳤다고 말하기조차 힘들어 겨우 붙어있는 숨만 가까스로 이어간다고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힘겹게 손가락을 놀려 도대체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부정의 극치에 다다른 어두운 공감대를 때로는 희화하기까지 하며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이 오늘날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자화상이다. 어두움은 전염되고,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그것이 누구에 대한 분노인지 명확히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마구잡이로 표출되는 분노는 사회 전체에 전염되어, 평범한 나로서는 미약한 상상력을 기를 쓰고 긁어 모아도 떠올리기조차 힘든 음울한 일들이 현실로 아주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나는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감히 단정 짓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개중에는 프랭클의 말처럼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 이 세상도 견딜만한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죽음 이외에는 다른 도피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으면서도 매일 자신의 용기 없음을 한탄하며 무가치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평균적인 이 세대의 삶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랭클이 겪었던 '가진 것을 모두 잃고, 모든 가치가 파괴되고, 추위와 굶주림, 잔혹함, 시시각각 다가오는 몰살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정도의 참혹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무조건적인 희망을 노래하지도, 무의미한 삶의 역설적 아름다움을 주장하지도 않고 냉철하게 어떤 사람이 모진 삶을 견딜 수 있는가에 대해 관찰과 경험으로 분석해낸다. 읽는 사람에 따라 이 기막힌 유태인의 경험이 무수히 많은 다른 방식으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3가지 관점에서의 삶의 지침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는 선택의 문제다. 아우슈비츠의 '정치적 죄인'들이 받았던 억압도 그들이 선택한 업보의 틀 안에 있다는 따위의 유치한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거의 모든 육체적 자유가 박탈되고 오늘 당장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었던 그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인간의 결정권만큼은 절대적이라는 저자의 말에 대한 깨달음이다. 어쩌면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도 우리가 과거 반복했던 수많은 선택과, 지금 자신이 위치한 현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인과 관계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체념의 비논리적 회피 기법일지 모르겠다. 사실 사소한 선택이란 없지 않을까. 매 순간의 결정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쓰나미가 되어 돌아올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둘째는 삶의 의미의 문제다.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로고테라피 기법의 근거를 마련한다. 그런데 여기서 견딘다는 말이 반드시 생존한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삶의 의미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강철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지도 않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사랑의 대상과 실제의 교감을 나누며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 그들의 생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말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긍정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불확실한 실망감이 주는 충격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부정적 인식에 가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며 최악의 상황을 우선 각오하고, 조금이라도 부정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세상 사는 법을 잘 모르는 미숙아인양 조롱한다. 이들은 약간 비겁하다. 긍정적 혜택은 모두 누리려고 하면서도 실망스러운 결과로부터는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여 도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범주에 있는 사람들은 행동력이 약하다. 실패는 받아들이나 변화시키지 못하며 혜택은 누리지만 발전시키지 못한다. 자신에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삶의 소명을 부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를 거부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주변의 환경이 자신을 선택하도록 내버려둔 채, 수감자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수감자에게 비참한 최후를 죄의식 없이 선사한다.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분노의 세대라고 한다.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분노가 가득히 대중적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확립되었을 때, 그리고 분노하는 주체가 개인이 아닌 집단일 때 분노는 비로소 폭발하게 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세대의 분노는 정상적인 표출 수위를 훨씬 넘어서,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고통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상관없는 사람들의 고통 분담을 강요하고 자신들을 영원한 애도와 위로의 대상으로 남겨두려 하고 있다. 모두 삶의 의미에 맞서 싸울 용기 없는 자들이 흘리는 가짜 눈물이 아닌가. 


네이버 책 정보 : 죽음의 수용소에서

평점 ★★★★☆

reviewed by lk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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